◎경제난 대선정국 속에 잊혀진 ‘인권보장’ 아쉬움/내년 인권선언 50주년 맞아 우리도 ‘국민기구’ 설립을「인권」하면 지금도 우리는 정치범이나 양심수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70, 80년대의 반독재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시국사범과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과 가혹행위가 인권문제의 대종을 이뤘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인권문제도 덩달아 해소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인권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시들해졌다. 우리 외무부장관은 93년의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한국에서 이제 인권은 성년을 맞았노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과연 우리의 인권은 문민정부의 출현을 계기로 단번에 암흑기에서 성숙기로 도약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의 인권상황만 일별해도 우선 전자주민카드제가 전격 통과되었으며 영장실질심사제는 저만치 후퇴하였다. 한동안 해괴하기 짝이 없는 양심수 논쟁이 진행되더니 결국 4·3사태 관련 다큐멘터리를 상영한 죄로 인권운동가를 구속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여전히 대통령후보들이나 진보적 사회단체들에 대해 「사상검증」을 요구하는 민간 사상경찰이 득실거린다. 때를 놓칠세라 공안당국 역시 모든 교과서와 석박사 논문에 대해 사상위험 여부를 판정하겠노라고 화답한다. 지구촌시대의 국제사회는 우리의 이런 행태와 특수성 주장에 냉소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 후보들은 침묵을 고수한다. 인권문제가 내치와 외교의 핵심쟁점이 되곤하는 선진국 선거판과는 영 딴판이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 장애인차별, 외국인차별, 동성애차별 등 각종 불합리한 차별이 만연해있다. 이런 차별들이 얼마나 각자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사회를 거칠게 하는지 모른다. 일상생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차별부터 없애고 타인을 존중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인권은 우리 모두, 특히 약자와 소수자의 일용할 양식이 돼야 한다. 약자와 소수자가 그리로 숨을 내쉬는 숨통이 돼야 한다. 자칫 상처받기 쉬운 약자와 소수자에게 특별한 존엄을 보탬으로써 사회 전반에 평등의 기운을 넘치게 한다. 인권보장은 실로 사회의 통합제 역할을 한다. 경제통합으로만 잘못 알려져 있는 유럽통합의 숨은 공로자는 유럽인권헌장과 유럽인권재판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우리 사회의 인권은 이제 간신히 걸음마 단계에 와있다. 우리는 아직도 성차별금지법이나 인종차별금지법 혹은 장애차별금지법 등 기초적 차별금지입법조차 구비하지 못한 실정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나 국가정보공개법 등 인권관련법률의 제정도 여전히 사치로만 여겨지는 상황이다. 다행히 90년대 들어 여성인권운동, 장애인인권운동, 외국인노동자 인권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제도와 절차, 의식과 관행의 뒷받침이 아직 미흡하기 그지없는 상태다.
최근 국내 민간인권단체들 못지 않게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것이 국제인권단체 및 국제인권기구들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인권조약이나 국제인권규범이 국내법원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인권의 국제화는 지구촌 시대의 역행할 수 없는 대세다.
여기에서 인권의 국제화와 인권의 일상화에 큰 역할을 할 국가기관의 존재가 요구된다. 유엔은 민간인권단체와 국가를 연결하고, 국제인권기구와 국내법원을 연결하는 제도적 통로로 이른바 국민인권기구를 설치할 것을 각 회원국에게 권고하고 있다. 이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필리핀 인도 러시아 남아공 등 많은 나라에 국민인권기구가 설치되어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이미 국제사회에서 국민인권기구의 설치를 약속한 바 있다.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인권의 날에는 국민인권기구가 설치되어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국면을 맞아 자칫하면 「경제위기」가 인권위기로 전화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각종 차별금지 등 일터에서의 인권보장은 생산성에도 좋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경제가 어려울수록 정부가 솔선해서 인권보장에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의 인내와 동참을 호소하고 설득하는데 좋다.
오늘은 49번째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선 오늘이 인권의 날이기도 하다. 평소 인권상 시상이니 인권심포지엄이니 떠들썩한 행사가 잇따르지만 국가부도로 마음이 뒤숭숭한데다 대선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썰렁한 인권의 날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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