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몇마디 말보다는 땀·눈물 흘리며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쓴말을 하지 않으렵니까97년 12월19일 아침 7시15분. KBS 제1라디오 시사정보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에 나온 15대 대통령당선자.
목은 좀 쉬었지만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가 전화로 연결되어 있다. 『안녕하십니까. 당선을 축하합니다. 참 힘드셨죠. 막판까지 박빙의 선두를 달리다가 엎치락 뒤치락 할 때는 정말 피가 마르셨겠어요. 잘 싸우셨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리면서…』
『…인도의 네루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게 정치라고 했는데 지금 대통령 당선자께서 소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동안 폭로와 비방, 고소와 맞고소로 사실 선거판이 살얼음 같았어요.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에선 덜 욕하는 후보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돌아간다고 했는데 솔직히 그래도 욕을 덜 하셨나 보죠?』
『…대통령에 재취임한 미국의 클린턴은 낙선한 정적 밥 돌에게 명예시민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낙선한 분께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기억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막바지 선거운동중 앞을 다투어 수많은 공약을 남발하셨는데 우선 순위를 정해 이것만은 기필코 지키겠다는 공약 몇가지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밀어준 후보가 대통령이 된 다음 5년내내 실정을 거듭하고 인기병에 걸려 사람의 태도가 180도 달라져 국민앞에 오만불손해지고 별것도 아닌 회의를 거창하게 주재하면서 정작 나라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오로지 한두사람의 의견으로 결정하는 파행적 국정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긴 아시나요』
『…이 사람 저 사람, 저 멀리 널리 보지 못하고 둘레에서 맴돌던 사람들만 발탁하여 정권주변에 든든한 벽을 치고 모양새 좋은 정부의 면모를 갖추는 식의 편협한 인사정책을 지양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지난 선거와중에서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몰려온 것은 지도력의 빈곤과 무지와 혼매 탓이었고, 기업도 잘못했고, 소비자도 잘못했고, 정부관료들은 특히 더 잘못했다고 언론은 비판하고 있는데 그 위의 정치 관제탑의 무능과 직무태만이야말로 「한국주식회사」를 이 지경으로 부도나게 만든 원죄 중의 원죄라고들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우리 정치리더십도 국제수준에 맞게 이치대로 투명하게 규칙에 맞게 허풍없이 거품없이 신뢰성있게 상식대로 정상적으로 매사를 처리해 나가야 할텐데 앞으로 잔꾀와 거짓, 무식해서 용맹무쌍한 것, 실력도 없이 큰소리 치는 허장성세를 지양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제가 워싱턴특파원으로 있을 때 아주 좋아하던 대기자가 있어요. 월터 리프만이라고. 그는 정치인이란 국민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지금 국민이 간절히 원하는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국민들은 기가 죽고 풀이 죽어 있어요. 과연 100만명이 넘을 실업인구를 집권후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일자리를 만들어줄 비방이라도 갖고 계십니까?』
『…1년반 혹은 2년내에 IMF체제를 청산하고 경제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공약하셨고 그렇게만 되면 주권을 회복하고 자긍심을 되돌려준 대통령으로 높이 평가 받으실텐데 그게 가능할까요』
『…제발 국민들의 마음을 끌려고 지금부터 달콤한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되도록 쓴 말을 해주세요. 윈스턴 처칠처럼 국민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십시오. 국민에게 호소하세요. 함께 고생하며 땀흘리고 눈물흘리며 무너져가는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호소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나치의 박해에 맞서 자유를 외쳤던 에르스트 블로흐는 모든 새로움은 절망에서 출발한다고 했어요. 존경하는 당선자님, 되도록이면 절망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동안 우리 정치인들은 뻔한 욕망을 숨긴 채 국민이란 이름을 팔아서 자신과의 약속마저 뒤집어 놓지 않았습니까. 약속만은 지켜주세요. 청와대에 들어간 후 나몰라라하고 사람이 싹 달라지진 않겠죠?』
『아, 참 잊어버릴 뻔 했네요. 저는 TBC 앵커맨때부터 고운말 써본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방송을 통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잘 하시도록 도와드릴테니까요. 그러니 제발 방송국에다가 툭하면 전화하고 그러지 마세요. 모두 놀라니까요. 부탁입니다. 다시 한번 대통령에 당선되신 것을 축하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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