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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여말선초 차인들의 서액이 즐비(차따라: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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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여말선초 차인들의 서액이 즐비(차따라:31)

입력
1997.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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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천 굽어보는 천하의 절경/누각찾은 객들을 차향으로 유혹하던 이웃 죽장사는 이제 간데 없고 삼장사란 절만 남아강원도 삼척 죽서루(보물 213호)에 올라 차 한잔을 마셔보면 신선이 따로없다. 정자 주변 나무들은 겨울을 맞아 옷을 벗은지 오래다. 그러나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다보이는 오십천의 흰 물줄기는 차맛을 더 돋운다. 나무가지에 설화가 피는 겨울이든 신록이 눈부신 봄이든 죽서루에 오르면 한잔 차 생각이 절로 난다.

고려말 조선초만 해도 죽서루는 차향기 그윽한 천하의 절경이었다.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 가정 이곡(1298∼1351), 제정 이달충(?∼1385), 율곡 이이(1536∼1584), 송강 정철(1536∼1593), 미수 허목(1595∼1682) 등 당대의 차인들이 소매를 걷고 한숨에 써부친 서액도 즐비하다.

경포대를 비롯 관동팔경이 툭 트인 바닷가를 내다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죽서루는 바다를 등지고 두타산에서 굽이쳐 내려오는 오십천을 굽어보는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다. 높고 낮은 자연암반위에 기둥을 세웠다. 아랫층 17개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그 윗층에 20개 기둥을 세운 독특한 양식이다.

지금이야 삼척시내 중심가에 파묻혀 살풍경한 시멘트 구조물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래도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아직은 과연이다. 멀리 백두대간의 능선이 구름속에 아스라하다. 명산 두타산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까이에는 이곳의 진산 갈야산 봉황산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두타산에서 오십굽이나 휘돌아 흐른다 하여 오십천이란 이름이 붙여진 큰 시내가 죽서루 아래 절벽에 부딪쳐 깊고 푸른 웅덩이, 응벽담을 만들어 놓았다.

죽서루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는 모른다. 두타산에 은거했던 이승휴의 문집에 죽서루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 원종(1266년) 이전에 창건된 건 분명하다. 정확하다는 동국여지승람에도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듯한 루를 지었는데 아래로 오십천에 임하였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의 절경」이라고만 적혀있을 뿐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지금은 대나무 숲이 별로 보이지 않지만 죽서루는 말 그대로 「대숲 서쪽에 있는 누각」이었다. 이 대숲 바로 이웃, 서북쪽에 언제나 차연기 풀풀 날리던 죽장사가 있었다. 경내에는 진주관 응벽헌 연근당 서별당 등 삼척도호부의 객사도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 충숙왕때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차인 근재 안축(1287∼1348)은 대숲에 가리워진 죽장사의 모습을 한수 시에 이렇게 그렸다.「웅덩이에 솟은 누각이 수부에 임하였고/ 담을 격한 선당은 바위를 기댔네. 스님을 좋아하는 참 뜻 아는 이 없고/ 십리에 뻗친 차 끓이는 연기/ 대숲에 이는 바람에 나부낀다」 안축의 시는 또 이렇게 계속된다. 「대나무가 여러 해 되니 아람되었는데/ 손수 심던 스님은 지금은 아니로세. 선탑과 다헌은 깊숙해 보이지 않고/ 숲을 뚫는 새만이 돌아 갈 줄 아는구나」

강원관찰사였던 용재 성현(1439∼1504)도 도내 순시길 도중에 이곳에 들어 역시 죽서팔경의 연작시를 남겼다. 「푸른 소나무 울창하게 봉우리를 감싸고/ 집을 사이하여 서로 부르니 스님이 돌아 나오는 구나. 차솥을 마주하여 종일토록 이야기 나누니/ 문득 몸에 청한한 기운 느끼겠네」

죽장사에는 늘 차연기가 자욱하였다. 날씨가 흐려 저기압인 날 연기는 대숲을 타고 건너와 죽서루를 뒤 덮었다. 담장을 사이하고 있는 관아에 머물고 있던 객들은 이 차연기에 이끌려 자주 절을 찾았던 모양이다.

십리에 뻗친 차 연기를 품어내던 죽장사는 언제 없어졌는지 모른다. 1970년대 와서 그 옛 터로 추정되는 죽서루 서북쪽에 죽장사대신 삼장사라는 이름으로 절집을 다시 지었으나 옛 정취는 찾을 수 없었다.

담장이 넝쿨로 덮여진 삼장사의 담장에서 내려다본 죽서루는 옆만 보였다. 수많은 풍류객이 죽서루에서 서성이다가 차향기를 좇아, 혹은 은은한 범종소리에 이끌려 대숲을 헤치며 올라 왔을 오솔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한·일 차인들은 빙렬에 스민 찻때를 차 오래 마셨다는 징표로 삼아/여유가 닿는다면 녹차용·발효차용 등 차그릇 구분해 쓰면 제대로된 차맛

차를 마시다 보면 차그룻에 찻물이 든다. 이른바 찻때이다. 찻물이 든 찻잔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찻잔이 지저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사람들에게는 찻때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들은 찻때가 잘 앉은 그릇으로 차를 권하면 금간 그릇에 차를 마시게 한다고 섭섭해 하기도 한다. 그 찻잔에 찻때가 앉기 까지 10년이상 공이 들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순백잔에 진한 암갈색 금이 깨진 도자기를 복원한 것 처럼 나 있다면 조금은 위태로운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빙열」이라고 하는 이 금은 유약과 그릇의 형체를 이루는 태토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크고 작은 금들이 세모 또는 네모 이상의 다변형이 불규칙한 듯 하면서도, 어떤 일정한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도자기는 먼저 태토로 형태를 만들어 초벌을 굽고, 다시 유약을 발라 재벌로 구운 후 식힌다.즉 빙열은 유약과 태토가 굽는 과정에서 팽창하고 식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의 하나이다. 이 빙열에 스민 찻때를 우리나라와 일본 차인들이 특히 선호하여 차를 오래 마셨다는 하나의 징표로 삼기도 한다. 심지어 초보자들이 마치 차를 오래 마셨던 것처럼 차그룻을 차와 함께 삶기도 하고 일부러 찻물속에 오랫동안 넣어 두어 때를 입히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과 서구에서는 이런 틈새가 있는 것보다는 찻물이 전혀 안드는 것을 선호한다. 찻때가 잘 앉는 부분을 살펴보면 유약이 시유되지 않고 손이 잘 닿지 않는 뚜껑과 거름망이 있는 부리 안쪽 부분이다. 그 부분에 다른 냄새나 이물질이 배어들기가 쉽다. 사실 찻잔에 다른 음료를 따뤄 마시면 한동안 그 냄새가 배어서 다시 차를 마실때도 그 냄새 때문에 차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차그룻은 차를 마실 때만 쓰는 것이 좋다. 여유가 닿는다면 녹차용, 발효차용 등으로 구분해 2∼3개의 각기 다른 것으로 쓴다면 제대로 된 차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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