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와 한국의 금융위기를 「아시아적」 시장경제의 한계와 좌절로 진단하는 유럽 어느 학자의 시각이 피부에 와 닿는다. 아마도 서양쪽 박애와 정의에 대비되는 아시아의 인정과 의리가 현대 경제사회에는 맞지않으니 이제는 끼리끼리 밀실에서 수근대던 버릇을 버리고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한 투명성을 확보하라는 뜻일 것이다.근래 구미에서 동아시아를 보는 눈의 상징적 예가 몇해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스필버그 감독의 「그렘린」이라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샌프란시스코 중국인촌 어느 독신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다람쥐 비슷한 동물이야기이다. 어두운 상자 속에만 보관하고 물과 음식을 절대로 많이 주지 말라는 노인의 유언을 무시한 미국 청소년이 귀엽고 애처러워 그 말을 어겼더니 그 동물이 순식간에 수만마리로 번식하고, 보이는 것마다 부수고 공격하는 수탉 비슷한 괴물로 변한다. 이 작은 괴물들이 집단으로 자동차와 트랙터를 몰고 희희낙낙, 미국의 농촌 소도시를 결딴내는 광란을 벌이다 소탕당하는 것이 1편이요, 다시 번식해 뉴욕의 과학연구실 초대형 건물을 점거하고 사람과 기물들을 박살내다가 햇빛을 받고 전멸한다는 것이 2편 이야기다.
묘한 것은 이 괴물들의 얼굴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째지고, 앞니가 크게 부각된 몽골계 사람들의 모습을 한 것이다. 요컨대 동양인에게 물과 음식으로 상징되는 기술과 돈이 주어지면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되는가를 그리는 것이라 하겠다. 추태를 부리는 한국인 해외관광객 집단, 과소비에 정신나간 우리들 일부, 무섭게 그쪽 경제계를 잠식해 들어가는 우리 일부 재벌등이 그들의 눈에 괴물처럼 비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돈을 벌 줄 알아도 쓰고 굴릴 줄은 모르는 단계에 있지 않은가. IMF구제금융을 느닷없이 받게된 우리는 모두가 웅크리고 지낸다. 병원에서 마주치는 외국의사 방문객에게 한달 전만해도 빳빳한 고개로 눈인사를 하였지만 오늘은 눈을 마주칠까 땅을 보면서 지나쳤다. 전문가마다 서로 탓을 돌리니 알 수가 없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국민 모두가 자기를 주범으로 보는데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서양쪽은 수백년간 발달해온 금융권이 있어 변화무쌍하기 이를데 없는데 막 태어난 우리로서는 따라가려면 얻어맞고 수모당하면서 배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이런 우리 수준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움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왜 좀 진작 손을 쓰거나 알려주거나 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인데 이것도 나름대로 몇가지 원인이 있으리라 본다.
첫째 대통령은 돈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분이다. 피땀 흘려 처자식을 벌어먹여 본 적이 없으니 돈을 모른다. 돈은 주위의 누군가가 항상 대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을 간수하고 굴리는데는 배운 바가 적었다.
둘째 대통령은 타고난 야당기질이다. 오랜 야당생활을 하면서 인기와 박수, 바람을 타는데 이골이 나 있어서 그것 없이는 일하는 재미를 덜 느꼈던 것이 아닐까.
셋째 자식과 가신을 교도소로 보낸 이후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양심과 본능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섞여있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초양심적」임을 강조하였으니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우울에 빠지면 만사가 귀찮고 결단을 못내리고 시간을 끌며, 세상과 자기를 원망만 한다. 부시 미국대통령도 임기말 한때 우울했기 때문에 일본방문시 쓰러져 토했는가 하면 선거운동도 제대로 못했다는 뒷말이 떠돈적이 있다.
우리는 어차피 국난의 공범이요, 주범들이니 참고 견딜 수 밖에 없다. 양과 같던 우리가 한국전쟁으로 바깥세상 주먹과 총칼의 잔인함을 겪고 배우고 분발해 오늘날 국제중진급 국방력을 키워놓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바깥세상 돈굴림의 매서움을 당하여 채찍맞고 수모받으며 배우고 또 배워 십년후에쯤 다시 한번 국제 어른사회에 명함을 내밀도록 하자.
주먹쓰기와 돈쓰기가 왜 이리 힘드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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