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요양 등 거쳐 의주까지는 양국 관리들이 오가던 ‘사신의 길’/“주상께서도 구명위해 온갖 조치” 성은에 감움하며 밤새 이야기꽃극적 만남이었다. 『역참에서 막 떠날 채비를 할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조선 사신이 온다」고 했다』 사행은 최부의 생환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선물도 주고 헤어졌다. 최부는 이 만남에서 국가가 「생존의 성소」임을 새삼 실감했으리라.
4월29일 유티엔(옥전)현에서 요란한 의장의 관인 행렬과 맞닥뜨렸다. 조선에서 돌아오는 명나라 사절 둥위에(동월) 일행이다. 둥위에가 쓴 당시의 조선기행문 「조선부」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고전이다. 둥위에는 최부와 수인사를 한 뒤 조선에서는 최부가 살아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위로했다. 최부의 표류는 당시 조선의 큰 뉴스였던 것이다. 조선인 최부는 「표해록」을 남겼고 중국인 둥위에는 「조선부」를 썼다. 이름없는 시골길에서 「역사의 맞수」는 이렇게 만나고 그리고 헤어졌다.
산해관은 엔산(연산)산맥과 발해만이 만나는 좁은 병목지대에 축성한 요새로서 예로부터 「천하제일관」이라 일컬어졌다. 바깥은 여진족이 날뛰는 랴오둥 땅으로 성 안쪽은 관내, 성 바깥은 관외라 하는 화이의 경계인 셈이다. 최부는 통관한 다음 닝위안(녕원) 소릉하 대릉하를 건너 광닝(광녕)에 도착했다. 광닝은 여진족 몽골족이 거주하는 광활한 중국 동부지역을 통치하는 최고 군정관인 이른바 삼당, 즉 요동태감 요동총병 요동순무 주재지이다. 삼당 요인들은 최부 일행의 표류를 동정해 옷가지와 음식 등을 선물해 환대했다.
광닝의 역사적 인물은 요동총병관 이성량(1526∼1618). 조선인의 후예인 그는 수십년 동안 총병관을 지낸 요동의 대군벌이다. 아들 5명이 다 총병관을 지냈는데 큰아들이 바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이여송이다. 이곳에 이성량 패방이 때마침 내리는 궂은 비 속에서 의젓이 서 있었다. 이른바 「사주삼문오루」식으로 모양은 사다리꼴, 높이 치솟은 4개의 돌기둥 사이로 길이 나 있고 누각 5개가 장엄하게 서 있다. 1580년에 세운 「진수요동총병관겸태자태보영원백이성량」이라 적힌 편액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광닝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최부가 때마침 광닝에 도착한 성절사 채수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상중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안될 말인 데 「표해록」에 『요신지전 설작이위(저를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엄격히 글자를 풀이하면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지 최부 본인이 술을 마셨다는 뜻이 아니다. 위로연에는 채수와 최부가 독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이들이 배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술과 고기는 그들의 몫인 것이다. 상중의 예를 엄격히 지키는 조선조 사대부가 어찌 주육을 권하며 또 술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최부는 생사를 건 표류과정에서 도적 앞에서, 그리고 황제 앞에서까지 상복을 고집해 예를 다하지 않았는가. 더더욱 최부가 술을 마셨다면 숨길 일이지 국왕에의 보고서인 「표해록」에서 어찌 이 대목을 서술했겠는가.<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단둥·단동에서)>박태근>
◎“최부 실종”에 발칵뒤집힌 조선 조정/성종임금이 직접 “연해 철저수색” 지시/대명사절 안처량이 “살아있다” 첫보고 올려
1388년 윤 1월3일 최부가 실종되자 성종은 각도 감사에게 관할 연해를 철저히 수색할 것을 시달했다. 또 우승지 경준으로 하여금 대마도나 일본에서 온 사신에게 최부의 표류사실을 통보하도록 했다. 성종실록을 보면 윤 1월3일부터 안처량의 최부 생존보고가 「접수된 날짜」인 4월15일 사이에 조선에 온 일본사신의 기록은 8차례 나온다.
최부는 왕명으로 특파된 「경차관」이며 공무집행 중에 실종됐고 성종이 총애하는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조난은 국가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4월15일 안처량이 긴급보고로 최부 일행이 중국에 표류해 귀국 중임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최부는 3월28일 베이징 옥하관에 도착, 6일전인 22일 안처량 사행이 귀국한 것을 알고 몹시 실망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처량은 최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최부가 항저우를 출발하기 전 지휘동지 양루가 먼저 3월12일 베이징에 도착, 병부에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안처량은 랴오양(요양)에 도착하는 즉시 긴급보고를 4월15일 정부에 전달했다. 이보다 10일 뒤인 4월25일 사은사 성건이 랴오양에서 보낸 추가보고가 또 도착했다. 요동도사의 진무(종6품) 왕시엔(왕헌)의 제보에 따른 이 보고는 「표류민 43명과 송환칙서를 휴대한 서반(종9품) 리시앙(이상)이 조선으로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표해록 초/“주상께서 예조에 하명,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빨리 찾아 보고하라고…”
4월27일. 위양(어양)역을 출발할 무렵 어떤 사람이 조선국 사신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은사 지중추 성건 등 일행이 역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역의 뜰에서 사신을 배알했다. 사신도 계단을 내려와 부복하며 말했다.
-주상께서는 평안하시고 나라는 무사하며 그대 고향도 무고하오. 주상께서는 그대가 표해되어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른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조에 하명하시어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빨리 찾아 신속하게 보고하라고 하셨소….
『(김중 등 표류한 일행에게)매미나 땅강아지 따위가 살고 죽는 것과 같아 생사간에 천지에 이롭거나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상의 염려가 우리 같은 소민에게까지 미칠 줄이야 어찌 생각조차 할 수 있겠느냐』
-(서장관 윤장 등은)처음에 표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탄식을 금치 못하였소. 오로지 성희안만은 「내 생각에 최부는 바다에 빠져 죽지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틀림없이 살아서 돌아 올 것」이라고 장담하였소, 이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그의 말이 맞았소.
4월29일. 유티엔(옥전)현 엔산(연산)에 이르렀다. 내가 호송관에게 물었다.
-이 지방이 한나라 우북평 땅이라고 하는데 리광(이광)이 「바위를 범으로 알고 쏘아 화살깃까지 박혔다」는 고사에 나오는 바위는 어디 있소.
-『여기서 동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무종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 무종국과 북평성 옛터가 바로 리광이 사냥 나가서 돌을 쏘았다는 곳이이오. 산위에는 연나라 소왕의 무덤도 있소』
5월7일. 동북제일의 관이라는 산해관에 도착했다. 산해관 동쪽에는 진동공관이 있었는데 병부의 관리와 군사가 상주하면서 동서로 왕래하는 사람을 일일이 조사한 뒤에 출입을 허락하고 있었다. 물긷는 여자나 나무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모두 패를 내주어 보이도록 했다.
6월4일. 날씨가 쾌청했다. 배로 압록강을 건넜다. 자정 무렵 의주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의주성은 한족과 여진족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성은 규모가 작은데다가 퇴잔하였으며 성안 마을도 쇠락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었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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