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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만 않으면 됩니다(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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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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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길을 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는 일에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마는 날마다의 삶이 어둡고 답답하고 짜증스럽기만 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그러고는 꼭 한마디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뽑았다가 그만 나라가 이꼴이 되었다』는 넋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그러나 각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정주영씨가 패배하고 나서 일본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영삼씨 같은 훌륭한 분이 당선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나 같은 것이 당선됐으면 나라가 큰일 날뻔 했어요』라고 했다는데, 「훌륭한 분」이 당선된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각하의 국민적 지지율이 한때 95%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때 정주영씨가 빈말을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동안은 훌륭하게 대통령 노릇을 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인기의 절정에서 각하께서는 오만과 독선으로 빠지신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심지어 왕조시대에도, 독선적인 군주가 나라일을 망친 경우가 허다합니다. 혁명으로 터지기는 루이 16세 때이지만 이미 루이 14세, 15세의 독선이 프랑스의 대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으로 상징되는 진나라 시황제의 절대권력이 그로 하여금 분서갱유의 만행을 서슴지 않게 했고 그것이 진나라의 몰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일전에 각하를 모시고 청와대에서 일을 돕기도 했고 뒤에는 장관자리에 앉아 각하를 보필한 문민정부 초기부터의 충성스럽던 일꾼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각하를 나무라기 전에 청와대 자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즉 시스템 자체의 부재를 개탄하였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무슨 명령이라도 마음대로 내리실 수가 있는데 청와대의 비서진은 전혀 그 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당황한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무슨 말을 어디서 누구에게 듣고 그런 발상을 하게 되셨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청와대 자체가 각하를 독재자로 만들었고 각하의 독재와 독주때문에 나라가 오늘 이 지경에 다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삼성그룹의 회장 비서실 규모보다는 청와대가 작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삼성의 비서들은 날마다 뛰어야 밥을 먹게 돼있지만 청와대의 300명이나 된다는 비서진은 무위도식할 수도 있는 게 사실 아닙니까. 대한민국에는 국회의장이 대표하는 입법부도 있고 대법원장으로 머리를 이룬 사법부도 있긴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나라의 권력구조에서 우뚝 솟아 신성불가침이라고도 해야 할 유일한 존재는 대통령 한분 뿐이었으니 유명한 역사가 액튼(Lord Acton)의 말대로 『절대의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게 마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검찰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우리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청와대―경제부처의 전·현직 고위관료들을 내사하여 「경제 실정」의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는 뉴스를 듣고 쓴 웃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국가위기 초래 때문에 문책·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전·현직 고위관료가 아니라 청와대의 주인이신 대통령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신 뒤에도 검찰은 그 잘못을 따지고 반드시 문책·처벌을 감행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떨립니다. 각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나 각하, 오늘의 국가적 위기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확신을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예를 하나 들고자 합니다. 제가 평양에서 일제하에 중학교를 다니던 때 저의 이웃중에 포목상으로 큰돈을 번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몽땅 잃고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살을 결심하고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는 갈빗대만 몇개 부러지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천신만고 끝에 예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각하, 죽지만 않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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