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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각서써라(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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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각서써라(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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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들면서부터 시작된 온 국민의 분노와 허탈이 한해 내내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통곡으로 해를 넘기는 나라. 대통령 선거가 있는 축제의 해라는데 소란과 법석으로 지새다가 선거일을 불과 2주일 앞두고 국치일을 맞은 한해. 어쩌다가 이런 나라가 우리나라이던가, 하필이면 이런 해가 축제의 해이던가. 나라는 난파 지경인데 대통령후보들은 차라리 기특하다 할까, 저마다 난파선의 선장이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 소리가 폭풍우속의 절규처럼 바람결에 날리며 찢어져 들린다.대관절 나라를 이꼴로 만든 책임을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

국민들은 경제파탄에서부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굴욕적 협상에 이르기까지의 실책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더욱 울화가 치민다. 경제난을 적기에 대처하지 못한 경제관료에 대한 문책론이 제기되고는 있다. 그러나 이 난국이 경제관료들만의 책임이기에는 너무나 파국적이다.

누가 뭐래도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경제부총리의 「사죄합니다」라는 발표문으로 책임의 소재가 호도되지 못한다. 대통령은 금년 들어서만도 여러 차례 국민에게 사과를 했으니 이제 더 남은 면목이 없을는지 모른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그것이 내란이나 외환의 죄가 아니고 실정법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실정을 해도 무한무죄인가. 아무리 나라를 짓밟힌 빈 깡통처럼 찌그러뜨려 놓아도 국가손괴죄는 없으니 그만이란 말인가. 일단 당선된 뒤에는 나라를 잘못 다스려도 사과담화만 되풀이하면 다 면책이 되는 것인가. 국민은 얼마든지 나누어 주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용서의 집괴라야 하는가.

대통령에게 책임이 없다면 대통령을 잘못 뽑은 국민의 책임이란 말인가. 국민들이 그 책임을 지고 국민의 자리를 사퇴하라는 말인가.

이제야 알겠다. 무엇 때문에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지 그 까닭을 알 만하다. 국가가 부도났다는데 겁도 없이 자기한테 맡겨달라는 간 큰 사람들. 그것이 진정한 구국일념의 애국심에서라 하더라도, 당선된 후 아무리 무능해도 책임지지 않는 안전성만 없다면 그런 용기가 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과거의 책임만 묻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미래의 책임도 미리 물어두어야 한다. 과거의 책임에 대한 문책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전에 장래의 책임을 담보로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5년전인 1992년 이맘때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의 개혁, 경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신문광고로 국민에게 공약했다. 5년후 그 결과가 오늘 이 국가적 수모다. 지금 대통령후보들이 다시 광고로 유세로 외쳐대는 약속들도 한번 크게 속은 국민들 귀에는 바람소리처럼 들린다. 어떤 후보는 「튼튼한 경제」를 내세우지만, 이것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싶었더니 알고보니 관공서마다 내걸린, 경제를 망친 현정부의 「국정지표」의 하나다. 또 어떤 후보는 「IMF의 치욕적 타결, 1년반 안에 극복하겠습니다」라는데 1년반 뒤가 무슨 국가적 어음결제일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또 다른 후보는 「젊은 대통령이 경제를 살릴 수 있습니다」라는데 경제가 무슨 청춘행진곡에 발맞추는 것이란 말인지, 이제 어떤 감언으로도 국민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다.

후보들은 당선되면 IMF와의 합의내용을 이행하겠다는 치욕의 각서를 썼다. 그러나 그보다는 국민에게 먼저 각서를 썼어야 옳았다. 국민과의 약속이 IMF와의 약속보다 훨씬 중하다. 지금이라도 국민과의 공약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각서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쓸 후보는 없는가. 임기중 공약을 어기고 실정을 하면 언제든지 스스로 물러나고 어떤 책임도 지겠다는 약속이 아쉽다. 당장 경제문제에 불똥이 떨어졌다고 해서 경제만 책임져서는 안된다. 그 약속은 중간평가의 형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이 후보때의 공약을 식언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각서는 식언에 대한 책임까지도 보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경제가 불안한 만큼 후보들에 대해서도 불안하다. 그나마도 책임을 공약할 용기라도 있는 후보에게 믿음을 줄 수 밖에 없다. 「나라를 망치면 당장 감옥에 가겠다」고 서약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어진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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