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신탁통치」를 경술 국치에 이은 제2의 「12·3국치」라 탄식하는 분노의 함성이 높다. 더러는 87년만에 또 닥친 「제2의 합방」이라는 자괴의 소리도 없지 않다. 그때는 일제가 포함외교와 식민지배로 나라를 병탄했었지만, 지금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국자본이 소리 소문없이 나라경제를 삼켜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병탄이란 게 뭔가. 「남의 물건을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림」 「삼켜버림」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 10위권안의 어느 유명재벌그룹조차도 곧 무차별로 불어닥칠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공세앞에서 불과 1억달러의 돈바람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게 됐다며 비상이 걸릴 정도라니 더 할말이 없어진다.
그래선지 「정축3적론」마저 공공연히 등장해 92년전의 을사5적에 대한 겨레의 함원을 상기시킬 정도라고 한다. 97년이 정축년 소의 해이고, 이 해에 나라의 경제주권을 이처럼 유린당하게 한 책임을 져야 할 쪽을 셋으로 꼽아 「정축3적」으로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축 제1의 적」이라할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누구일까. 나라안팎에서 이미 그 해답이 나와 있다고 한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경제수석 등으로 상징되는 금융·외환정책의 실무책임을 진 관리들이라는 게 민심의 소리이다. 우리 금융관리들은 올해 초부터 국내의 금융연구원과 민간연구소 등에서 제출한 경제위기경고 보고서에 대해 회수소동을 벌이고 함구령을 내리며 면박을 주는 등으로 거듭 묵살했음이 드러났다.
그뿐 아니라 기아사태로 야기된 연쇄부도사태와 그로 인해 점증하는 외환위기에 대해서도 정책적 대응에 실기했을 뿐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반대로만 나아갔다는 게 외국전문가들의 따끔한 지적이다. 억지로 환율억제선을 고집하다 오히려 환투기를 불러들였고 금융안정 및 정상화대책을 늦춰 외국자본의 대탈주를 부추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소용없는 환율방어선 지키기에 귀중한 달러만 허비해 부도사태를 앞당긴 책임조차 있다는 게 아닌가.
의원으로 돌아간 강경식씨는 한나라당 입당이 좌절당하는 등 정치적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게 국사를 망친 우리 관리들의 책임이 그것 정도로 끝날 수야 없을 것이다.
「정축 제2의 적」은 또 누구일까.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한 오만과 방만의 우리 재벌들일 것이라는 게 여론이다. 나라 안팎에서의 줄기찬 지적에도 아랑곳없이 자동차산업에 대한 무리한 신규과잉투자와 차입경영을 감행, 국가부도사태의 한 원인을 만들었고 이제는 그 뒷감당을 못해 고심하는 국내 굴지 재벌그룹 등의 잘못도 따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벌들이 앞장서 이룩한 한강기적만들기의 큰 공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다급하게 기아를 목졸라 자동차 과잉투자위기를 벗어나려 하다 결국은 나라목을 조른 결과를 빚은 사태의 책임을 국민들은 지금 묻고 있는 것이다.
「정축 제3의 적」이라는 오명은 당연히 현정권의 몫일 것이다. 권위있는 어느 언론의 조사로는 응답자의 77%가 오늘의 국난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한바 있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서움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의 비싼 수업료도 모른채 세계화와 선진국진입을 큰소리치다 나라경제 지키기에 실패해 무능의 대명사로 전락한 참담한 현실인 것이다.
이같은 「정축 3적」의 폐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능한 공룡임이 드러난 재경원을 과감히 개혁해 전문금융관료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등 우리 정부기구와 정책대응체제를 단련·강화하는 것이다.
이제는 벌거벗겨진 우리 재벌들이다. IMF경제신탁통치체제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절한 변신과 체질강화의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련을 끝내 이겨내 우리 경제주도권을 지키는 굳건한 보루로 남아주길 그래도 고대하는 국민들의 눈길을 재계는 잊지 말아야 한다.
무능한 정권을 막는 길은 결국 잘 선택하는 일로 귀착될 것이다.
이런 무거운 과업과 제2의 국치라는 업에서 우리가 언제쯤 헤어날 수 있을지―. 참을 인자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고난의 세월이 우리의 앞을 지금 가로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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