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물줄기가 만나 넓은 모래밭을 만든 압록리/물소리만이 정적을 깰듯 숲속에 숨은 청아한 사찰/남도의 겨울풍경이 좋다남도의 젖줄 섬진강의 넉넉한 품을 안고 달리는 17번 국도와 전라선에선 겨울의 서정과 남도의 풍요함이 한데 어우러진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봉황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전남 곡성군의 동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보성강과 구례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곡면 압록리에서 만나 큰 강이 되어 흘러간다.
곡성군은 골짜기(곡)가 많다는 이름처럼 산세가 발달해 너른 들을 연상하게 되는 남도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전라선이나 국도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외지 사람들이 쉽게 오긴 힘들었을겁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섬진강에 뗏목을 놓아서 오갔다고 하데요』 구압록교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일호(44)씨의 말이다.
남도의 겨울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강마을 압록리는 섬진강의 물줄기처럼 맑은 서정을 간직하고 있다. 압록은 겨울이면 청둥오리떼가 많이 날아들어 붙여진 이름.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쳐지는 곳이라 해서 「합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즈음 압록마을을 찾으면 섬진강에서 잡아올린 누치, 참게 별미요리를 맛볼 수 있다. 섬진강 초입의 압록유원지는 여름이면 3만 여평의 넓은 백사장에서 야영을 하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겨울철에는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전라선 직선화 공사로 이곳 백사장도 여름철 못지않게 활기를 띤 모습이다.
압록에서 보성강을 끼고 18번 국도를 따라 5.3㎞쯤 내려가다 보성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3번 군도로를 따라 5㎞를 달리면 태안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신라 경덕왕 1년(742년)에 창건된 태안사는 숲속에 숨은 청아한 사찰. 통일신라 말 문성왕 9년(857년) 혜철(785―861)선사가 산문을 열었다.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으나 조선 초기 억불정책으로 쇠락했다.
태안사로 오르는 길은 선방의 명상적인 분위기를 닮아 있다. 계곡 물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잡목과 측백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2㎞쯤 오르면 능파각이 먼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능파각은 계곡 양쪽에 있는 암반을 이용해 낮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통나무 두개를 얹어 주변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숨을 고르고 일주문을 맞도록 한 배려다.
일주문 앞의 부도들은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신비감을 자아낸다.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275호)를 비롯, 부도 5개가 자리잡고 있다. 부도밭 앞쪽의 연못 중앙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고려 초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태안사를 빛나게 하는 것은 천불전 위쪽에 위치한 혜철선사의 부도와 부도비. 이곳으로 가려면 배알문을 지나게 된다.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깎아낸 배알문은 고개를 숙여야 지나칠 수 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겸손한 마음을 건축 속에 담아낸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혜철선사의 부도와 부도비는 지리산 주변에 남아 있는 부도비들 가운데 비교적 빠른 시기의 것으로 부도 변천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태안사 곳곳에는 「청정도량이니 이곳에서는 조용히 해주십오」라고 씌어진 푯말이 세워져 있다. 발소리, 말소리를 죽여가며 경내를 둘러보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맑아진다. 남도의 겨울은 태안사의 정적처럼 서늘한 기운으로 나그네를 감싸준다.
곡성군은 지리산의 관문 구례군과 이어져 지리산 산행길에 들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곡성은 남원을 거쳐가는 것이 좋은데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남원IC에서 시내로 들어가 17번 국도를 따라 가면 곡성에 이른다. 17번 국도로 계속 가면 구례가 나온다.<곡성=김미경 기자>곡성=김미경>
◎사라지는 간이역
두평 남짓되는 역사에 하루 종일 승객은 2∼3명. 역사 주변에 추억처럼 피어난 노란 들국화. 앨범 귀퉁이에 꽂아놓은 빛바랜 마른 들풀처럼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하는 간이역. 세월의 흐름 속에 간이역도 이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울―여수를 오가는 전라선은 다른 노선에 비해 간이역이 많다. 그러나 89년부터 시작된 직선화 공사로 간이역이 사라지고 있다.
섬진강 초입에 있는 간이역 압록역은 「고현정 소나무」가 있는 정동진역과 함께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곳. 태수 엄마(탤런트 김영애 분)가 빨치산이었던 남편의 뼈를 지리산 자락에 뿌리고 스카프만 홀연히 남긴 채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곳. 김영애가 서있던 곳의 소나무에도 「김영애 소나무」라는 별명이 붙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압록역에서 간이역의 정취를 느낄 수 없게 됐다. 36년에 세워진 구역사는 지난 8월 이미 철거됐고, 역사 신축과 철로 공사가 한창이다. 임시로 마련된 역사에 옮겨놓은 수동식폐쇄기만이 옛 자취를 더듬게 한다. 『새 역사가 들어서면 편리하기는 하겠죠이. 그래도 인제는 다 베려부렀소』 최일식(45) 부역장은 사라져가는 정취가 못내 아쉽다. 내년 1월이면 새 역사가 완공된다.
그나마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전라선의 간이역은 오류역, 서도역, 곡성역, 주생역 등 10여곳 정도. 곡성역의 역사는 33년에 지어져 그간 내부만 몇차례 고쳤을 뿐 지금까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 봄에 신역사가 완성된다. 곡성역이 신역사로 옮겨지면 남원의 주생역이 전라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남게 된다. 주생역은 33년 지어진 건물 그대로가 남아 있다. 하루 이용 승객은 2∼3명. 여객열차로는 비둘기호가 두차례 정차한다.
곡성역 역장 윤동희(33)씨는 32대 역장. 부임한지 6개월 됐다. 주생역 역장 문영식(35)씨는 39대째. 부임한 지 한달이 됐다.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지키는 이들에게서 세월이 무상함을 느낀다면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일까.
◎인근 맛있는 집/담백한 참게탕·눈치회깔끔한 불고기정식 등 수두룩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산과 들을 적시는 섬진강은 물이 맑아 은어, 참게, 재첩(가막조개)이 많이 난다. 은어는 6월이 제철. 추석 무렵에서 첫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는 참게가 제철을 만난다. 참게는 집게다리에 가시가 나고, 손가락에 털다발이 달린 것이 특징. 겨울엔 누치(이곳 사람들은 눈치라고 한다)가 많이 나는데 회로 먹는 게 제격이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구압록교 근처의 용궁산장(0688―62―8346)은 섬진강 일대에서 나는 참게요리가 별미다. 주인 한일호·김봉심 부부는 곡성이 고향이다. 『섬진강에서 잡힌 참게는 씨알이 굵고 맛이 좋아서 옛날에는 임금님께 진상을 드렸다고 해요. 이만 좋으면 발만 남기고 다 먹죠』 한씨는 참게 숫자가 점점 줄고 있다고 걱정한다. 섬진강 물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란다. 참게탕은 칼칼한 맛과 참게 특유의 담백한 맛이 어울려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우거지와 시래기까지 곁들여 국물맛도 시원하다. 반찬으로 따라 나오는 참게장도 고소하고 담백하다. 2인분에 2만원이며 양도 푸짐하다. 참게탕은 2만5,000원(2인분), 3만5,000원(3인분), 4만5,000원(대)짜리가 있다. 담백한 맛이 특징인 누치회는 한접시에 2만원. 용궁산장 옆에 위치한 통나무집(0688―62―3090)도 맛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곡성에 가려면 남원을 거치게 된다. 광한루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지산장(0671―625―2294)은 한정식 전문집. 종가집 맏며느리인 시어머니에게서 음식을 배웠다는 주인 염순종씨는 얼굴처럼 손맛도 곱다. 불고기 정식은 얌전한 상차림에 맛도 깔끔하다. 2인분에 2만원. 국물맛이 진한 사골탕(5,000원)도 별미다. 42년간 추어탕만을 고집해온 새집식당(0671―625―2443)도 미식가의 발길을 잡아끈다. 지리산 일대에서 잡은 자연산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 5,000원. 미꾸라지 튀김은 1만5,000원.<곡성=김미경 기자>곡성=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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