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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 오계/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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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 오계/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입력
1997.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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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없이 급습한 추락 불안하지만 냉철하게/제대로 넘어지는 법 배워 ‘아시아의 거인’으로 다시 오뚝 일어나자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가. 30년 성장이 이렇게 추락하고 마는가. 이제는 조금 여유있게 돌아보고 못한 것 추스르고 복지와 민생에 투자하고 후진국에 보태며 그렇게 사는가 싶었는데. 경계경보도 없이 급습한 침몰사이렌에 국민은 불안하기에 앞서 어리둥절하다. 정치인들은 어디 있나? 경제책임자들과 경제관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때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고 있었다. 광주에서 수백명이 죽어갔을 때 우리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80년대의 어두운 시절에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 때문에 절망하는 법을 배웠고 절망할수록 밝은 빛이 가까이 다가옴을 깨달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한반도 상공을 뒤덮은 이 사이렌은 무엇인가. 나에게는 대선의 요란한 구호가 들리지 않는다. 사회질서와 사회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사회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냉철하자. 침몰하는 배에서 책임공방은 부질없는 것. 추락할 때 제대로 넘어져야 거뜬히 일어나는 법. 위기를 극복하는 몫은 결국 국민이 지게 되므로 다시 오뚝 일어날 수 있는 「낙법 오계」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두자.

첫째, IMF의 구제금융을 500억달러 받게 되면 한국의 순외채는 약 1,000억달러가 된다. 외채규모로 세계 수위를 다투는 상황이다. 그러면 가구당 1,000만원꼴의 빚을 지게된다. 외채를 갚지 못하면 IMF와 경제대국의 식민상태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를 2∼3년내에 갚으려면 모든 가구가 매년 500만원씩 절약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가계지출을 그만큼 줄이고 당장 내일이라도 은행에 가서 적금통장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외제품은 외화낭비의 주범이므로 금물이다. 식별이 어려운 것은 은밀한 표시를 해두어서라도 국산품임을 알리자. 국내기업에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주려면 값이 비싸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당장 국산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외산설비재와 부품은 어쩔 수 없으므로 소비재만이라도 국산품을 고집하자. 그리고 제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사치성 소비재는 진열장에서 모두 거두어 수출항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

셋째, 기업은 차입경영과 중복과잉투자를 자제해야 한다. 87년 이후 10년 동안의 기업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무리한 투자와 이를 감당하기 위한 외채도입이 결국 이런 화를 불렀다. 주력산업에서 중복투자는 이것으로 끝내자. 국내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른 자동차업계는 생산라인을 다른 것으로 돌리거나 새로운 수출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야 하며 전자업계는 아군끼리의 출혈경쟁으로 결국 가격하락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짓을 중지해야 한다.

넷째, 기업이 방만한 경영을 반성하는 것은 좋으나 무작정 20∼30% 감량을 감행하는 것은 인적 자본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내소비를 결빙시켜 경기회복에 악순환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예비해고자들에게 할애하여 실업충격을 완화하는 것이 현명하다. 난시에는 국민 상호간의 연대와 협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치권과 사회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문제의 소지를 정확히 일러주고 분명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라. 이것이 개혁에 미숙한 YS정권이 국민에게 보답하는 최후의 봉사이다. 치료의 단계와 소요기간, 예측되는 결과를 담은 일정을 제시하고 국민이 수행할 행동지침을 내놓아야 한다. 병명을 모르고야 치료방법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영국과 멕시코의 사례로 미루어 한국경제가 추락하기 전의 수준을 회복하는 데에는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거품이 걷히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사람들은 「시장의 환상」을 버려주기 바란다. 시장은 밭과 같아서 갈고 닦으면 생산성 높은 옥토로 변하고 버려두면 잡초만 무성해 진다는 한국적 시장논리를 몰래 감추어두자. 미국적 경제논리로 무장한 IMF가 오히려 아시아경제의 비장의 무기를 녹슬게 한다는 일급 경제학자들의 우려가 미국내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제 모두 추락할 준비를 하자. 30년 고속성장에 한번 쯤의 추락은 약이 되는 법, 그러나, 「아시아의 거인」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IMF에 한 수 가르칠 날을 기다리며, 제대로 넘어지는 법을 익히자. 「낙법 오계」는 책임질 사람을 구태여 탓할 가치가 없을 때 독한 오기로 자수성가해 온 민족이 스스로를 추스르는 최선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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