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자금지원을 요청한 지 열흘만에 협상이 성사돼 한국경제는 한동안 IMF의 통제하에 움직이게 됐다. 솔직히 이러한 일은 중남미의 나라들이나 동남아의 후발국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생각하였으나 이제 우리가 그 처지가 되어 참담함을 금할 길 없다. 경제적 풍요여부를 떠나서 한 나라의 문제가 자율이 아니라 타율에 의해 처리되기는 해방이후 처음있는 일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문제를 이같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일차적으로 현정부의 무능과 위기대처능력 부족 때문이다.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이 보유한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목표를 향해 이끌고 가기는 커녕 방향을 잃고 헤매게 하다가 드디어 좌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냉정히 따져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번의 위기는 금융·외환위기이다. 이것은 우리 금융기관이 해외의 자금공여자들로부터 신용을 잃어 자금공여가 두절되고 기왕에 들어와있던 외국투자가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생긴 것이다. 국내금융기관의 해외 신인도가 떨어진 것은 총여신의 15%나 되는 부실채권(런던 「이코노미스트」 추정)때문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도 부실채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1%미만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정부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데도 있다. 부실채권 규모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총 여신의 6.8% 수준인 26조 2,000억원으로 발표하고 있으나 해외에서는 이를 믿지 않고 있다. 외환보유액도 270억달러인지 100억달러인지 정확하지 않다.
한국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은 재벌의 방만한 차입위주의 경영관행 때문이다. 금융에서 이권을 챙기는 지대추구행위가 박정희정권이래 관행이 되어왔다. 저리의 자금을 최대한 차입하여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정서가 모든 재벌과 중견기업의 철학이 되어온 것이다. 이를 위해 로비와 정경유착이 고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위로는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아래로는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부패의 극치를 시현해 왔다.
일부 소비자와 근로자도 자기 몫을 챙기는 정치투쟁을 일삼았고 분수에 맞지않는 기형적 소비행태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1,200억달러에 달하는 외채에서 보듯이 온 나라가 남의 돈을 가지고 흥청망청한 것이다. 이러고도 잘 될 것을 기대했다면 도둑놈의 심보일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200억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빌려준다. 이 돈을 빌려주면서 깨진 독에 물붓듯 그냥 주지는 않는다. 빠른 시일 내에 한국경제가 회생하여 빚을 갚아주면 국제통화기금으로서 역할도 하고 세계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된다. IMF가 요구한 사항은 무엇보다도 금융기관의 정리이다. 자기자본비율이 낮아 부실한 종금사 중 12개를 즉시 정리하는 것을 포함하여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부실기업의 구조조정도 강도높게 요구하였다. 동시에 경제성장률을 3% 이내로 억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총통화율을 10%내로 억제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세금을 더 거두어 들이며 재정에서 7조 3,000억원을 삭감하여 구조조정자금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이것은 우리경제가 남의 빚으로 흥청망청하는 버릇을 고치는데 필요하다고 본다.
내년부터 일정기간 우리경제는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당장 실업이 증가하고 부실경영의 한계기업들이 계속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이러한 고통의 과정이다. 고통을 감수하면서 정부지원이 아니라 냉혹한 시장원리가 작동하도록 해야하고 재벌의 경영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여야 3당이 주장하는 금융실명제 유보나 기업채무 지불연장을 위한 긴급명령 발동 등의 논의는 사태를 조기 수습하는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는 그릇된 방향이다. 금융실명제는 이번 사태와 그다지 관련이 없고 장기적으로 한국경제를 선진화하는 요체가 된다. 지불연기 등을 위한 긴급명령은 부실기업의 정리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시민과 근로자도 올바른 소비생활과 저축을 증대시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외국 빚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축을 증대하여 빚을 줄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사치성 소비를 줄이고 불요불급의 소비를 미루는 등 분수에 맞는 소비생활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경제학>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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