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도착 다음날 명병부 심문받고 조사마감/황제가 의류 하사… 상중이라 일행 대신보내베이징(북경)에 도착한 다음날인 1488년 3월29일, 최부는 명나라 병부에 출두했다. 뜻밖에도 준엄한 심리는 없었다. 실무관료인 낭중 다이하오(대호) 등은 심문은 커녕 수인사가 끝난 뒤 청사 안마당에 서 있는 느티나무와 표류를 주제로 시를 지으라고 청한다. 당시 동아시아사람들은 공동문자격인 한자를 매개로 마음의 교환이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시를 주고 받는 것이 하나의 지적 풍속이었다. 이때 최부가 지은 시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상중의 시작은 금기였기 때문에 표해록에는 단 한 수의 시도 실리지 않았다.
최부에 대한 최종심리를 사실상 면제한 것은 저장(절강)성의 5개기관(진수태감, 순안감찰어사, 도사, 포정사, 안찰사)의 합동조사 결과 「별무간세정유(간첩의 징후는 별로 없다)」라는 보고를 믿었기 때문이다. 또 최부 일행의 도착에 앞서 3월20일 예부가 조선의 안처량 사행을 통해 최부의 신분과 표류 사실을 확인한 것도 도움이 됐다. 병부 직방사의 간단한 심문으로 조사는 무사히 마감됐다. 직방사는 작전동원, 병력배치, 경비, 군사지도제작 등을 관장하는 중요 부서이다.
최부는 심문 중에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번 유신을 만나며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인 기요다(청전, 당토행정기·당토행정기의 저자)는 이 대목에 대해 『하루에 네번 유신을 대면한다는 것은 거짓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폄하했다. 근자에 후손인 최기홍씨가 「대동야승」에서 성종대왕이 하루에 네번 유신을 만난 기사를 찾아내 해묵은 험담을 일소했다.
4월6일. 회동관 뒤채에 묵고 있는 유구(오키나와)사신 정붕의 수행원 진선 등이 음식을 갖고 와서 최부 일행을 대접했다. 조선난민의 소식을 듣고 위로차 온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먼 손의 고마움에 아무 것도 가진 것없는 최부는 지급받은 양식에서 쌀 5되를 퍼내 답례로 주려하자 그들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유구인의 호의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4월27일 진선은 일본부채 2개 등을 선물하며 귀국인사를 해왔다.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는 진선의 말에 최부는 「당신과의 만남은 바로 정에 있소이다」라고 고마워했다. 이에 진선은 「아버지가 20년전 사신으로 조선에 가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제 그대를 만나니 참으로 반갑다」고 답했다.
한편 중앙정부의 인도적인 호의가 최부를 아주 난처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예부의 주선으로 황제가 최부 일행에게 의류를 하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부는 대궐에 두번 들어가야 했다. 첫번째는 수상, 두번째는 사은때문이다. 상복을 벗고 예복차림으로 입궐하는 것은 효의 예법에 어긋나고 반대로 상복차림으로 입궐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행위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최부는 예부 관원과 의논해서 우선 편법으로 본인은 출두하지 않고 수하의 정보 일행이 대신 가서 받게 했다.
다음날 사은의례에 참석하기 위해 최부는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자금성이 시작되는 장안좌문에서 상복을 벗어 예복으로 갈아입고 승천문(천안문)을 지나 황궁의 정문인 오문광장에 도착, 사은예를 한 다음 장안좌문으로 돌아와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부보를 받은 후 최부는 제주에서, 표류의 바다에서, 중국의 땅에서 일찍이 상복을 벗은 일이 없었는데 베이징에서 단 한번 상복을 벗게 된 것이다.
최부 일행은 베이징체류 25일만인 4월24일 그리운 조국을 향해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앞길은 삭막한 랴오둥(요동) 땅이다.<박태근 안동대 교수(중국 베이징·북경에서)>박태근>
◎회동관/명·청시대 외국사절위해 만든 공식숙사/속칭 옥하관… 지금은 최고인민법원 위치
회동관은 중국의 명, 청 시대 베이징에 오는 외국사절을 위해 만든 공식 숙사이다. 당시 중국으로 파견된 조선사절은 반드시 회동관에 체류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난징(남경)에 있었으나 성조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에는 베이징으로 옮겼다. 조선을 비롯한 유구, 베트남, 샴, 일본은 물론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사절도 여기에 머물렀다. 병부가 관리했으며 1441년 남, 북 이관으로 나뉘었고 북관은 6곳, 남관은 3곳이다. 관리인은 대사 1명, 부사 2명이고 부사 중 1명이 남관을 관리했다.
1492년 예부의 주객사(외교담당 부서)에서 주사 1명을 차출해 제독(관리자)으로 임명, 운영했다. 병부와 예부가 공동 관리한 셈이다.
최부 일행이 체류한 곳은 바로 회동관인데 옥하관이라 부른 것은 중옥하교 서쪽 가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속칭이다. 관문에는 「회동관」 세 글자의 편액이 걸려 있고 안에는 「만국래동(여러 나라 사람이 온다는 뜻)」이라 쓰여 있다.
옥하는 지금은 복개되어 정의로라는 거리로 변했다. 옥하교는 원래 상, 중, 하 3개가 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동·서 방향의 동교민항과 남·북 방향의 정의로가 만나는 작은 십자로가 옛 중옥하교이다. 이 네거리의 동북쪽에는 베이징 인민정부, 중국인민해방군 베이징 위수사령부가 있다. 서북쪽은 중국의 공안부, 국가안전부의 후문이 있고 번지는 동교민항 25번지. 그 옆 (서쪽)은 신축된 최고인민법원이 있으며 번지는 동교민항 27번지. 이 두 곳이 옛 옥하관 자리이다. 연전에 한 일간지가 옥하관 자리를 정양문에서 동쪽으로 숭문문에 이르는 전문동대가의 3번지인 캐피탈호텔로 보도한 것은 잘못 비정한 것이다.
18세기 초 옥하관은 러시아전용 공관 즉 아라사관으로 바뀌고 조선사절 공관은 남쪽으로 옮겨졌다. 지금의 전문동대가 9번지로 베이징 공안국자리이다.
◎표해록 초/지금은 상중 몸이라 예복은 예에 맞지 않소… 더우기 상복입궐은 도리에 어긋
3월29일. 병부를 방문, 낭중 다이하오(대호)와 문답을 나누었다.
―당신네 나라는 치상에 주문공가례를 따르지 않소.
『우리는 아들을 낳으면 먼저 소학과 가례를 가르치고 과거시험에도 유학에 정통한 사람을 선택하는데 상은 한결같이 주문공가례를 따르오』
―당신네 나라 국왕은 글을 좋아하오.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번 유신과 만나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남에게 배우는 것을 낙으로 삼고 계시오』
4월11일. 왕넝(왕능)이라는 사람이 우리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할아버지는 대대로 요동에서 살았지요. 나 역시 고려사람입니다. 31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올량합에게 납치당하여 결국 달단국을 전전하다 가까스로 살아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며 술을 가져와 위로했다.
4월18일. 예부를 방문하자 낭중 리구이(이괴) 등이 내게 일렀다.
―내일 일찍 대궐에 들어가면 옷을 하사할 것이니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하오.
『지금 상중의 몸인지라 예복은 예에 맞지 않소이다. 더욱이 상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날 것이오』
―상을 받을 때는 다른 이로 하여금 대신 받도록 하여도 무방하오. 하지만 모레 사은 때에는 황제께 직접 절을 해야 할 것이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소.
4월20일. 이효지 허상리 권산 등이 상으로 받은 옷가지를 입은 채 말했다.
―전에 정의사람들이 현감 이섬을 따라 이곳에 표착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상을 내리지 않았는데 상을 받은데다 황제에게 사은까지 하였으니 어찌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들이 명나라에 무슨 공이 있다고 상을 주었겠는가. 왜그런지 아는가. 그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덕 때문이니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네』
4월23일. 지금 명나라는 구습을 일소하는 정책을 세우는 한편 옷을 입을 때 오른쪽 섭을 왼쪽 섭 위로 여미게 했다.
또 의복이 좁고 짧은 것이 남녀가 같았으며 음식은 정결하지 못하고 귀천을 막론하고 같은 그릇을 쓰고 있었다. 베이징의 산은 모두 헐벗었고 냇물은 더러우며 그 토질은 모래흙으로 먼지가 일어 하늘을 뒤덮으니 오곡이 잘자라지 않는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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