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애로를 느끼는 시대가 바로 고대사와 현대사이고, 가장 하기 편한 시대가 조선시대사이다. 고대사는 기록자료가 부족해서 연구하기 어렵고 현대사는 기록이 많은 듯하면서도 믿을 만한 기록이 없어서 어렵다. 이러한 현상을 거꾸로 말하면 연구하기 편한 시대가 가장 정치가 발달한 시대이고 연구하기 어려운 시대가 정치가 낙후된 시대이다.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정치가 미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조선시대와 현대를 비교해보면 흔히 봉건시대로 부르는 조선시대가 오히려 정치수준이 높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적어도 기록문화에 관한한 그렇다. 우선 최고통치자와 관련된 기록만 해도 실록을 비롯해서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다양하다.
이것들은 모두 일기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어느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실록은 국정전반의 기록으로서 그 편찬과정이 엄격하여 정사의 자리를 차지한다. 승정원일기가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의 기록이라면 비변사등록은 국가안보회의기록이다. 정조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일성록은 왕의 개인일기라고 볼 수 있는데, 경연에서 어느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거동할 때 어디에서 무슨 가마를 타고 무슨 옷으로 갈아 입었는지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남김없이 기록해 두었다.
국가의 주요 행사를 행사별로 기록해 놓은 의궤는 더욱 놀랍다. 예를들어 정조의 수원행차를 기록한 의궤에는 식사메뉴와 그릇의 수, 그릇을 산 비용 등까지 적혀있고 정조의 수원성건설을 기록한 의궤에는 건설사업에 투입된 노동자의 이름, 근무일수, 품삯, 거주지 등이 있다. 요즘말로 건설실명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정치를 만인에게 공개하고 후세인들의 평가를 당당하게 받으면서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최고통치자의 통치행위를 기록을 통해 발가벗겨 놓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철저했다. 그 덕에 왕조사 연구가 어느 시대보다 활발한 것이다.
해방후 서양식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대통령을 이미 일곱사람이나 뽑았고, 이번에 여덟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코 앞에 닥쳐왔으나 물러난 대통령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날자별로 알려주는 정사의 기록이 없다. 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공개되지 않는 기록은 의미가 없다.
왜 당당하게 자신의 치적을 기록하여 공개하지 못하는가. 신문이나 일부 인사의 회고록으로 정사가 복원되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일종의 야사라고 할 수 있다. 정사는 없고 야사는 무성하니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러니 우리가 목도한 현대사가 사실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요, 연구를 할 수 없으니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고 교훈을 찾기도 힘들다. 나라를 이런 식으로 경영하고도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기만 하면 민주주의가 되는 것인가?
요즘 대통령 후보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하는 토론회가 수없이 열리고 있으나, 정치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국정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전통을 제도화하는 문제는 토론주제로 제기되지 않고 있다. 다음 정권부터는 청와대에 현대판 사관을 상주시켜 대통령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기록하도록 하면 어떨까. 옛날에는 붓으로만 기록했지만 지금은 카메라와 녹음기 등 문명의 이기를 동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비서실도 매일 일기를 기록하고 대통령이 물러나면 실록청을 설치하여 정부 각 부처의 기록을 모아 대통령 실록을 편찬하면 어떨까. 그래야 대한민국 정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이 없는 정치는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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