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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 경제위기 극복/고통과 희생의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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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 경제위기 극복/고통과 희생의 3년

입력
1997.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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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변동폭 확대… 페소화 하락▷94년 12월20일◁

취임 20일째인 에르네스토 세디요 멕시코대통령은 무거운 발걸음을 기자회견장으로 옮겼다.

그는 페소화의 환율변동폭을 15.3%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사실상 페소화의 평가절하로 멕시코 경제의 추락을 알리는 신호였다. 바로 전날에도 하이메 세라 부체 재무장관이 페소화 평가절하는 없을 것이라고 밝힌 터여서 이 발표는 멕시코는 물론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페소화의 가치는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고 주가도 동반 폭락했다. 멕시코 경제는 한 치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이틀 뒤에는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이 전격 발표됐다. 더 이상 정부가 외환 시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외국인 주식투매 주가 44% 폭락

▷94년 12월27일◁

페소화 가치는 일주일사이에 64.7%나 떨어졌고 이에 놀란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투매로 주가도 44%나 폭락했다. 세디요 대통령은 29일 세라 부체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경제비상대책을 발표했다. 물가상승 억제, 외국기업의 투자촉진 등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정부 대책은 무용지물이었다. 페소화 가치와 주가는 연일 기록을 경신하면서 폭락해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이 마비상태로 들어갔다. 국민들은 우울한 연말을 보내면서 물가상승률이 150%를 넘나들던 80년대의 악몽을 떠올렸다. 세디요 대통령조차 『환율자유화가 삽시간에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94년말부터 95년초까지 200억달러를 넘는 외국인 단기투자자금이 빠져 나가 가히 외환공황 상태였다.

○IMF 등 516억달러 지원약속

▷95년 1월3일◁

정부는 중앙은행 노동자, 농민, 재계대표를 모아 여신 제한을 통한 긴축경제, 예금자 보호를 위한 지원 등에 합의하고 철도 공항 항만의 민영화와 세금 감면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 비상대책을 내놓았다. 멕시코 정부는 위기 대탈출을 위해 구조조정과 국민대화합이라는 두가지 해법을 동시에 선택한 것이다. 경제성장률을 4%에서 1.5∼2%로, 물가상승률을 4%에서 15∼20%로 각각 목표치를 수정했다. 임금인상률도 7%내로 억제하고 공공지출도 줄이기로 했다. 이런 비상대책으로 서민생활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노동자들의 반정부시위가 잇따랐고 인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주가도 폭락하기 시작했다.

남미 전체로 번지는 금융위기 조짐을 두고 미국이 팔짱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1일 미국 정부가 멕시코 페소화 폭락을 막기 위해 400억달러의 차관을 지급보증하겠다고 발표했다. 멕시코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지원을 거부했다. 멕시코는 2월 최종적으로 516억달러의 지원 약속을 받았다.

○야당도 협력,정치개혁안 합의

▷95년 1월17일◁

야당도 위기극복에 동참했다. 세디요 대통령은 4대 야당대표들과 수십년간의 대립관계 청산을 위해 선거법 개정을 비롯한 정치개혁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분쟁지역인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군대가 철수하고 반군들도 휴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위기는 그리 쉽사리 극복되지는 않았다. 경제위기로 민심이 집권여당에 등을 돌렸다. 2월12일 할리스코주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의석을 「싹쓸이」했다.

정부의 위기탈출 노력은 계속됐다. 3월10일 정부 지출을 10% 줄이고 유가를 30% 올린다는 내용의 신경제 계획이 나왔다. 발표에 앞서 멕시코 재계와 노동계는 정부의 긴축정책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크게 효험을 기대하기 어려운 응급처방에 불과했다. 페소화의 폭락은 여전했다.

○IMF개입 가혹한 구조조정

▷95년 5월31일◁

세디요 정부는 IMF의 지휘를 받아 만든 국가개발계획을 내놓았다.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2000년까지 6년동안 과감한 세제·금융개혁, 제조업 농업 광업 관광업 등 4대 산업육성,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등을 통해 연 5%대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한편으로는 충분한 외화가 수혈되고 있었다. 세디요정권은 지지율 급락을 감수하더라도 기어코 경제만은 살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꺾지 않았고 경제구조조정은 일정대로 착착 진행됐다.

국민도 동참했다. 폭발적으로 늘기만 하던 소비를 줄이는 등 경제안정에 적극 협력했다. 그 결과 94년 전체 수입의 12%이던 소비재 수입이 95, 96년에는 7%대로 내려갔다.

위기극복 과정에서 IMF의 개입은 가혹할 정도였다. IMF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고 멕시코 정부의 자율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석유 수출대금을 뉴욕의 IMF계좌에 담보로 입금하는 것은 굴욕적인 조치였다. 채권자에 대한 보증금인 셈이었다.

국민의 희생도 컸다. 연 10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2만2,500여개 기업이 도산 위기에 몰렸다. 실업률과 비례해 자살자가 늘어 났고 언론은 연일 우울한 실업자의 자살 소식을 전했다.

○위기 10개월만에 희망의 빛

▷95년 10월5일◁

위기 10개월 만에 멕시코 경제는 희망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멕시코정부는 이날 미국에서 긴급수혈받은 차관을 상환하기 시작, 국제자본시장에 당당하게 복귀했다. 국제자본시장에서 자력으로 자금을 끌어 외채를 갚을 수 있을 정도가 됐고 95년에는 만기가 된 단기외채 290억달러를 모두 갚았다.

멕시코는 애초에 IMF가 지원을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273억달러만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미국빚은 예정보다 3년 빨리 갚았고 올해 들어서는 IMF 구제금융도 갚기 시작했다. 94년 297억달러였던 경상수지 적자가 95년에는 16억달러, 96년에는 18억달러로 줄었다. 또 95년 마이너스 6.2%였던 경제성장률도 96년에는 5.1%로 돌아섰다. 페소화 가치도 96년부터 안정세를 지속했다. 94년 61억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고도 97년 2월에는 207억달러로 늘어 났다. 주가지수도 94년 페소화 위기 이전 수준을 크게 넘어 섰다.

○“아시아도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

▷97년 11월22일◁

경제위기 발생 만 3년을 맞는 세디요 대통령은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자리에서 경제위기를 맞은 아시아국가 지도자들에게 『즉각적으로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즉각 시행해야 한다』고 충고했다.<조재우 기자>

◎멕시코 회생의 기수 세디요 대통령/정치개혁통해 경제개조 추진력 얻어/잇단 선거의 참패 굴하지 않고 과감한 사정·기득권 포기로 야당·국민의 진정한 협조 성취

멕시코가 경제위기에서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45)의 과감한 정치개혁이 원동력이었다.

세디요가 취임한 94년, 멕시코의 정치는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65년간 계속돼 온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으로 부패와 부정이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3월에는 제도혁명당 대통령후보가 유세도중 암살당했다. 또 몇달뒤에는 제도혁명당의 사무총장이 암살됐다. 이들 사건은 당시 살리나스 대통령이 퇴임후 새대통령으로부터 부정부패에 대해 공격받을 것에 대비해 배후조종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 일가를 비롯한 특권층의 국고횡령, 뇌물수수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1월에 일어난 남부지방 농민폭동의 후유증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경제는 깊이 멍들어 가고 있었다.

세디요는 우선 개혁 성향의 젊은 엘리트를 대거 각료에 임명하면서 정치개혁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특히 권력의 핵심부인 검찰총장에 사상 처음으로 야당계 인물을 임명했다. 전통적으로 「거수기 집단」이었던 의회에 국정조사권을 부여, 기능과 위상을 높였다. 공무원의 자의적 결정에 좌우됐던 법체제도 정비했다. 법원에서 부패한 판사를 몰아내고 참신한 인물을 등용했다.

그는 또 야당과 선거법 협상에 합의하면서 그동안 여당이 누려온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했다. 여당이 독차지해 온 선거자금을 야당도 공평하게 분배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여당 입김이 거셌던 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도 보장, 명실상부한 선거관리를 가능하게 했다.

세디요는 제도혁명당 장기 일당독재에서 발생한 폐해를 제거하지 않고는 경제발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피력하면서 개혁세력을 결집시켰다.

세디요 정치개혁의 백미는 지난 7월의 중간선거. 이 선거에서 세디요가 이끄는 제도혁명당은 멕시코 제2의 권부인 멕시코시티 시장자리를 야당에 내주었고 하원선거에서도 여소야대로 바뀔 정도로 참패했다. 31개중 6개주의 지사를 뽑는 지방선거에서도 경제중심지인 중·북부 2개지역을 야당에 빼앗겼다.

그러나 세디요는 「패배한 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를 개혁하지 않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세디요는 선거에서는 졌지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구세력과의 싸움에서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런 세디요도 집권초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초긴축 정책으로 인한 대량실업과 임금억제 등의 고통이 워낙 컸기 때문. 그러나 불과 3년 사이에 세디요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다.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경제회복을 추진한 결과다.<정숭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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