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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직도 금기인가/현기영 소설가(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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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직도 금기인가/현기영 소설가(아침을 열며)

입력
1997.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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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서준식씨가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와 관련해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지난 5일 구속기소됐다. 이에 대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까지 그의 체포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드높게 들려오고 있다. 10월초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인권영화제에 출품돼 관심을 끌었던 「레드 헌트」는 어떤 내용이고, 영화의 소재인 「4·3」은 또 무엇이길래 저명한 인권운동가까지 체포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을까. 아직 그 영화를 보지않고 4·3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아마도 그것을 외국영화인 줄 생각하리라. 왜 그렇지 않겠는가. 영문 타이틀도 그렇고 지난달 부산의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니 그런 오해를 살만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레드 헌트」는 문자 그대로의 「빨갱이 사냥」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날조하여 사냥하는 행위를 일컫는, 아주 역설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중세의 서구사회에 횡행했던 「마녀사냥(Witch Hunt)」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무고한 수많은 여인들이 사악한 마녀, 혹은 마녀와 내통한 자라는 누명을 쓰고 종교제단의 희생물이 되었듯이 현대의 냉전체제 속에서는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념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레드 헌트」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50년 미국 정계에 한바탕 휘몰아쳤던 매카시 선풍의 와중에서였을 것이다. 극우파의 책동에 의한 그 용공조작사건에서 수백명의 공직자가 직장에서 억울하게 추방당하고 많은 문인, 예술인, 지식인들이 빨갱이라는 누명 아래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피해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여서 행복에 겨운 엄살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용공조작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는 「빨갱이 사냥」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수만의 무고한 인명을 파괴한 4·3의 참혹상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4·3연구자로서 이념적 편향을 싫어하는 필자에게 이 영화는 별로 과장·왜곡이 없는 사실의 정직한 기록으로 보여서 호감이 갔다. 그런데도 왜 당국은 이 작품이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토대로 하고 있는 생존자들의 증언, 미군정의 「G2 보고서」, 당시의 신문보도, 연구자들의 해설 등은 필자도 익히 알고 있는 자료들로서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영화가 주는 감동의 직접성과 파급성, 당국은 바로 그 점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을 앞두고 이 작품이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은 일반의 상식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일 텐데 그것을 갑자기 뒤집고 새삼스럽게 이적표현물로 문제삼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이 이적표현물이라면 왜 그 작품이 한쪽 영화제에서는 무죄이고, 다른 영화제에서는 유죄인가. 똑같은 사안을 놓고 그렇게 이중의 잣대질을 해도 되는가. 아마 당국도 처음에는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영화가 인권영화제에 진출하면서 파급효과가 더욱 커지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손을 댄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엄청난 진실이 제압될 리도 없고 은폐되지도 않는다. 어찌 손바닥 하나로 푸른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체포된 서준식씨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풀려날 가망이 없다면 법정에 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된다면 아직까지도 금기투성이인 4·3이 시비곡직을 가리는 법정논쟁을 통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며 여론에 실릴 수 있을 테니까.

반세기 전, 바깥세상과 단절된 해상봉쇄령이 내린 가운데 섬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결코 발설해서는 안될 무서운 금기여서 오랜 세월 모든 사람의 입을 얼어붙게 했던 그 사건, 호사한 관광객 행렬이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광의 배후에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음습한 기운으로 엉켜있는 수많은 슬픈 넋들….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은 산 자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제상을 마련했다고 진혼되는 것은 아니다. 억울함을 해원하기 위해서는 왜 죽게 되었는지 진상을 낱낱이 밝힌 축문이 그 옆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뜻에서 영화 「레드 헌트」는 4·3의 축문이요, 진혼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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