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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반성의 시간/채서일 고려대 교수·경영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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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반성의 시간/채서일 고려대 교수·경영학(한국논단)

입력
1997.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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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업·국민과 정당·대선주자들 모두 각자의 책임 통감하고 다시뛸 준비를 해야한다어떤 젊은이가 산길을 가다 길을 잃고 말았다. 당황한 젊은이는 그저 아래로 아래로 정신없이 길을 찾아 내려가기만 했다. 다행히 깊은 산속에 사는 노인을 만나 길을 찾게 되었는데 노인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이보게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네. 높은 곳에서 보아야만 눈앞이 트이고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경제가 바른 길을 찾아 전진하기 위해서는 그 노인의 말처럼 높은 산을 올라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침착함과 다시 길을 찾아 산길을 내려오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우리 경제가 다시 제갈길을 찾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한 전국가적인 반성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처지가 되어 경제신탁통치의 수모를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뼈를 깎는 반성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첫번째 반성의 주체는 정부이다. 5년전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찬란한 공약들에 비하면 결과가 너무나 참담하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지난 5년간 무엇을 했단 말인가. 바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우리경제는 기초가 견실해 금융위기에 몰릴 이유가 없으며 정부가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던 정부였다.

몇번의 수습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은 것은 정부를 믿고 따른 국민에 대한 배임행위임에 틀림없다. 이제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책임을 통감하고 사태수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머니를 뒤져 달러 몇장이라도 찾아내고 도움이 될까 은행을 찾는 평범한 국민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다음 반성의 주체는 기업이다. 부도를 내고 쓰러지면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기업인을 본 기억이 없다. 정부가 좀더 도와주지 않는다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그들에게서 진정한 주주인 국민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은 찾을 길이 없다. 차입금을 통한 무리한 확장과 방만한 경영 때문에 스스로의 명을 재촉했던 우리 기업들이다. 정부의 보호에 의존하거나 로비를 통한 이권획득에 연연하던 구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국민도 이제 대한민국의 졸부잔치는 끝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일부 국민에 해당되겠지만 큰 부자나 되는 듯 조금 못산다 싶은 나라에 놀러가서 거들먹거리던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라가 빚더미에 앉는 줄도 모르고 비싼 외제물건을 마구 사쓰던 모습도 부끄러워 해야 한다. 나라가 빚더미에 앉으면 국민도 빚더미에 앉는 셈이다. 우리의 부모들과 선배들이 개미처럼 일해서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각오, 우리 아들 딸들에게 빚더미의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각 정당과 대선주자들도 대오각성해야 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에 정신이 팔려 나라야 어찌되건 서로 물어뜯고 싸우지 않았던가 스스로 질문하고 반성해야 한다. 금융개혁법안의 처리를 두고 벌이던 각 정당들의 나태함은 그들이 국가적 위기 앞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 공인인가를 의심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전 일본의 정황을 탐색하고 온 조정의 두 사신이 완전히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서로 당파가 달랐던 두 사신은 국난의 위기 앞에서도 힘을 모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를 보고 받는 관료들도 사실 확인보다는 자기 당파의 주장이 그저 옳다고 우겼던 웃지 못할 비극이 있었다. 요즈음 정당들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전 역사책에서 읽은 이 장면이 떠오른다. 정치인들이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사인지를,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살피는 진정한 애국의 자세를 이제라도 가지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상대에게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이다. 이 위기를 이기지 못하면 다같이 쓰러질 것이고 이 위기를 극복하고 활로를 찾으면 다같이 일어설 것이다. 철저한 전국가적인 반성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보여줄 수 있다. 위기 속에는 항상 반전의 기회가 존재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우리의 옛속담도 있듯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고 침착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뛸 준비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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