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일행이 북미 준고위급회담을 위해 워싱턴의 국무부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크게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끈질기게 추구해 오던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왜 그런가가 단숨에 드러난다. 핵문제를 매개로 94년 미국과의 제네바 회담을 「성사」시켰던 북한은 말레이시아 하와이 등지를 맴돌다 뉴욕을 거쳐 드디어 미국의 심장부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제네바에서 워싱턴까지 3년이 걸린 셈이다.북미 준고위급회담은 그동안 기껏해야 뉴욕에서 열려왔다. 북한으로서야 항상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기를 원했지만 미국도 장소의 상징성이 얼마나 민감한가를 언제나 알고 있었다. 우리정부는 북미접촉이 있을 때마다 미국정부로부터 사후 브리핑을 받아왔지만 여기에 관여할 입장은 전혀 되지못했다. 다만 미국 스스로가 그때 그때 남북관계나 한반도정세를 감안해 속도나 내용을 조절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였다. 김계관 일행의 워싱턴입성이 어떤 함의를 갖는가는 남북한과 미국 누구나 다 안다. 이를 보는 우리 정부의 느낌은 어떨까. 떨떠름하고 당황스러움속에 속수무책의 속앓이에 빠져 있으리라고 짐작해도 무리는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미북관계는 지난 한달사이에 유난히 가속페달을 밟아왔다. 지난 21일 4자회담 예비회담개최가 결정된 것이 그렇고 예비회담 석상에서 내달 9일 4자회담 본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것도 3시간만의 일사천리였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미국과 북한의 페이스였고 우리정부가 소외됐다는 지적은 이미 알려진 대로이다. 북한에 대한 대규모 식량지원을 미국이 사전확약했다는 밀약설이 나오고 있지만 어디서도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이르러 우리정부 고위층의 무리한 판단과 결정이 개재됐다는 흔적은 진하게 풍기는게 사실이다. 조직계선상의 정부 실무책임자가 이번 결정과정에서 제외됐다는 후문도 있다. 4자회담 개최는 기록으로는 이 정부의 치적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회담합의직후 당장 주한미군철수와 대미 평화협정문제 등 한미양측이 거부했던 의제를 다시 끄집어 내는 마당에서는 본회담이 열려봐야 예비회담과 똑같은 판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정권말기 누수현상의 최악이 작금의 경제위기라고 한다면 남북문제와 대미외교에서도 「업적주의」가 횡행하는 누수가 엿보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