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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무지(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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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무지(장명수 칼럼)

입력
1997.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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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도 방송도 없는 곳에서 뉴스와 단절된 채 지난 몇주를 보낸 사람들이 갑자기 오늘의 나라 형편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벌집쑤신 듯 시끄러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까. 이게 대체 어느 나라 얘기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나라고 현실을 의심할까.그들은 물론 깜짝 놀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다 된 것처럼 떠든게 바로 작년 일인데, 1년만에 나라가 부도상태라니 이럴 수가 있나라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중 대부분은 곧 『그럴 줄 알았다』고 오늘의 사태를 수긍할 것이다.

나라를 이런 식으로 운영해도 될까, 이러고도 안 망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었던 불안이었다. 한국이 보릿고개의 굶주림에서 벗어난 것은 불과 사십여년, 짧은 기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자부심으로 모두가 흥분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들뜬 눈으로 보기에도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패였다. 재벌과 권력이 결탁하여 금융기관을 주무르고, 은행 돈을 마구 꺼내다가 나눠 먹고, 신기루 처럼 솟아난 재벌이 주먹구구로 막대한 투자를 하다가 쓰러지고, 그 부담으로 국가경제가 골병들고,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하면 수백억원 수천억원이 쏟아지고, 그 돈은 조건 없이 받은 돈이니 죄가 안 된다는 괴변이 활개칠 때, 누가 그 나라에서 희망을 보겠는가.

어떤 계층의 과소비도 의문투성이었다. 어린 자녀들에게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어 마음대로 쓰게 하고, 몇천달러 몇만달러짜리 사치품을 척척 사들이고, 하룻밤 유흥비로 수백만원을 쓰고, 하는 일이란 골프여행이나 도박 정도고, 자녀들 혼수로 수억원을 쓴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 돈은 다 어디서 나올까. 그들을 수용할 만큼 우리나라가 부자가 되었을까.

사회전체에 퍼져있는 일하기 싫어하는 풍조도 걱정거리였다. 근로 의욕이나 생산성은 올라가지 않는데 임금은 올라가는 나라, 임금이 올라가도 모두가 불만인 나라, 직업정신과 장인정신이 사라져가는 나라가 어떻게 계속 성장할 수 있겠는가. 불과 이삼십년전 열심히 일하여 국가경제와 가계를 일궜던 나이든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는 민족이 잘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떠올리며 불길해 했다.

국정전반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공직 사회의 분위기도 불안을 주었다. 취임후 수없이 장관들을 바꿨던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20일 7번째의 경제부총리를 임명했다. 5년이 채 못되는 기간에 경제팀을 7번이나 바꾼 나라에서 경제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기적이 아닐까. 경제관료들의 텃세로 겉돌다가 물러났다는 부총리가 하나 둘이 아닌데, 대통령이 과연 경제를 무엇으로 생각하며 국정을 수행하는지 불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침내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과 그에 따른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떻게 이룬 경제발전인데 국정을 잘 못 이끌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는 분노와 허탈과 근심이 온 나라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 경제의 실패에서 비상식의 실패를 절감했다면서 IMF의 「훈육」으로 거듭나서 새 질서와 상식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개혁을 외치며 출범한 김영삼정부가 끝내 못이룬 개혁, 오히려 악화시켜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간 정경유착의 고리를 IMF가 끊어주기를 기대하는 국민에게 감히 정부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기나라 정부보다 IMF를 믿겠다는 국민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이번 사태는 국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총체적인 신용의 부도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오만은 무지에서 오고 계속 무능의 악순환을 부른다. 급변하는 세계, 밤낮 없는 경제전쟁, 국경 없는 정보의 유통과 물량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바보가 아니고야 어떻게 오만할 수 있겠는가. 세계 11대 경제국이라고 자랑하면서 어떻게 한국적인 사고와 구조로 경쟁하겠다는 것인가. 경제의 투명성이 아시아에서도 최하위권인 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향해 우리 경제의 저력을 믿으라는 것인가.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할 수 있을까라는 국민의 불안을 외면하고 큰소리치던 정부가 어떻게 고통의 동참을 국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가. 오만과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이번 사태의 최대 교훈이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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