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통행에 영험” 잇단 권유에도 “외국신 못섬긴다” 용왕묘 참배 거부/조선선비의 합리주의사상 펼치며 대운하장정 한달반만에 북경 안착좋은 사료는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정확해야 한다. 「표해록」이 바로 그렇다. 최부는 『쉬저우(서주)성은 팽성역에서 북쪽 2, 3리에 있다』고 기록했고 중국의 「서주지」는 『팽성역은 쉬저우성 남쪽 3리』라고 전한다. 두 기록이 거의 일치한다. 쉬저우는 「병가필쟁지지」라는 말처럼 전략적 요충이자 남북교통의 십자로로 중국의 허리나 다름없다. 우리는 송나라 소동파가 홍수를 다스린 기념으로 지었다는 황루를 찾았다.
황루는 쉬저우의 대표적 명소지만 그것보다는 온갖 먹거리와 흥청대는 연도풍경이 이색적이다. 현대도시로 탈바꿈한 쉬저우시의 중심가에 환상적인 중세의 저자가 재현된 것이다. 필자는 중국 땅을 여러번 여행했지만 이런 곳을 목도하기는 처음이다. 이리저리 펼쳐놓은 온갖 잡동사니 물건, 호객, 흥정하는 아우성, 약장사의 묘기…. 군중을 비집고 들여다보면 멀쩡한 사십대의 종자를 거느린 풍채좋은 한 노인이 접부채로 흥을 돋우면서 삼국지의 관운장의 「오관참장」대목을 읊어댄다. 이른바 설서, 즉 이야기꾼이다. 풍악소리 요란한 천막 속에서는 「서상기」의 짙은 러브신이 펼쳐진다. 푼돈으로도 진종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최부는 쉬저우에서 북쪽 90리의 협구역을 지나 황가갑 수문에 이르렀을 때 「미산만익비」를 보고 호송관의 허가를 가까스로 얻어내 모두 베꼈다. 그리고는 페이현에 도착한다. 페이현은 한제국을 건설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제왕의 고향을 가리킨 「풍패지향」이란 고사숙어는 여기서 비롯됐다. 최부는 한제국의 성지에서 「가풍대」와 장량의 고사가 얽힌 이교등을 둘러봤다. 가풍대는 기원전 196년 한고조가 경포의 난을 평정하고 개선 길에 고향에 들러 지은 「대풍가」의 시비인데 현재는 박물관에 원비와 원나라때 제작된 모조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 이렇다할 산업과 자원이 없는 페이현은 관광붐을 타고 「한고조고향」임을 널리 알려 외지인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나라 궁전과 거리를 재현한 어마어마한 고대 성곽도시로 초한지 팬을 불러들일 계획이다. 초한지의 영웅들은 페이현의 바닥인생 출신이 많다. 두목인 한고조는 건달출신의 역장인 사수정장. 소하는 현의 아전, 조참은 옥사정, 번쾌는 개백정, 주발은 풍각쟁이. 이런 밑바닥 민초들이 시대의 소명으로 엄청난 역사를 창조했다.
페이현을 벗어나면 바로 산둥성 관내. 최부는 위타이(어대), 지닝(제녕), 운산(문산)등지를 지났다. 위타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호송관은 관례대로 용왕묘에서 참배하고 최부에게 절하도록 했다. 최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참배거부 이유는 예론이다. 조선조 예법은 개인은 「주자가례」, 국가는 「국조오례의」에 따른다. 제후는 산천에 제사하지만 보통사람은 조상에 제사한다. 보통사람이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월권행위이다. 『조선에서 산천참배를 못했는데 어찌 외국의 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당연한 반론이다. 호송관이 다시 참배하면 운하통행이 무사하다고 「영험론」을 들고 나오자 최부는 미신배격의 차원에서 『내 이미 수만리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겪고 살아 나왔는데 중국의 강물쯤이야 무엇이 두렵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조선 선비의 냉철한 합리주의 사상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초자연적인 미신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는데 500년전 최부처럼 추상같은 합리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최부는 항저우에서 텐진, 베이징에 이르는 대운하 장정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약 한달 반 만에 마친다. 마침내 1488년 3월28일, 표류에 휩쓸린지 2개월여만에 베이징의 조선사신 공관인 회동관에 안착했다. 그리던 고국에 가까이 온 것이다.<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중국 페이현·패현에서)>박태근>
◎미산만익비/운하사 중요자료… 중국 기록엔 흔적없어/최부의 비문기록이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
최부가 「미산만익비」의 금석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선비로서 지극히 당연했다. 「표해록」 중에서 비문이 실린 것은 오직 「미산만익비」 뿐이다. 이 일대가 미산호에 수몰되면서 대운하의 산 증인인 빗돌은 지표상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혹시나 해서 쉬저우(서주)박물관의 리인더(이은덕) 관장에게 물어봤으나 탁본은 고사하고 『그런 비석이 있었느냐』고 되물어왔다. 최부의 기록은 이 빗돌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다. 베이징대학 거쩐자교수는 『비문은 운하사의 중요한 자료인데 중국기록에 없고 또 중국의 운하사 연구자가 인용, 연구한 바도 없다』고 한다.
수수께끼의 비석은 언제 누가 세웠을까.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명 영종의 천순무인년(1458)에 세운 황가갑 수문의 비석임을 알 수 있다. 황가촌(황씨의 집성촌) 동쪽에서 운하로 합류하는 개천의 급류와 토사를 막기 위해 새로 수문 「황가갑」을 세웠다는 것이다. 비문은 명의 대운하 전면개통의 과정과 의의, 또 쉬저우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아울러 안전통행을 위한 수문의 필요성 등을 잘 요약해 설명한다. 황가갑수문은 쉬저우의 운하담당 관원인 판관(종7품) 판둥(반동)의 건의에 의해 건립됐다. 판둥은 이보다 3년전인 1455년 페이현 남쪽에 비운교갑을 설치했고 비문 「패현신설비운갑기」는 전문이 오늘날 남아 있다.
비명인 「미산만인」은 소동파의 고사에서 따온 말인듯 싶다. 소동파는 쓰촨(사천)성의 미산 출신이기 때문이다.
◎표해록 초/“당신은 돌아가 관직에 진력,임금을 섬길텐데 어찌 앵무같다고 할 수 있겠소”
3월6일=페이현(패현)은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강기슭 너머에는 가풍대라는 현판이 걸린 정문이 세워져 있다. 고조가 스스로 지은 대풍을 노래하던 곳이다. 강의 서쪽 기슭 이교는 장량이 신발을 얻었다는 고사가 얽힌 다리이다(장량이 젊었을 때 다리 밑에 떨어진 황공의 신발을 주워서 신은 인연으로 병서를 얻었다는 고사가 전해짐).
3월8일=노교갑의 서쪽에는 흑연지가 있었는데 물이 검었다. 리유라는 태감이 베이징으로 부임하고 있었는데 행차가 얼마나 요란한지 산천을 흔들고 있었다. 리유 태감은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 뱃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등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천호 푸룽(부영)이 물었다.
―귀국에도 이런 태감이 있소.
『우리나라의 환관은 다만 궁중의 청소나 왕명을 전달하는 일 외에 관의 일에는 일체 참견을 하지 못하오』
―태상황제는 내관을 신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환관마저 많은 권한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는 까닭에 문무관들은 모두 그에게 매달려 있는 형편이라오.
『지금은 명나라 시대인데도 대당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요』
―다른 이유는 없소. 오랜 관습에서 그러는 것뿐이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를 「오야지」라고 불렀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일본사람은 우리를 「대인」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소. 그 사람들은 아마도 당신들이 일본에서 오지 않았나 하여 그렇게 불렀을 것이오.
3월12일=앵무새를 보면서 내가 푸룽에게 말했다.
―『이 새는 농서에서 왔고 나는 해동에서 왔소.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오. 나와 이 새는 객지타향에 와 있는 것도 같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같고 행색이 꾀죄죄한 것도 마찬가지 아니오』
―이 새는 새장 속에 있다가 끝내는 타향에서 죽고 말 것이오. 당신은 돌아가 관직에 진력하여 임금을 섬길 텐데 어찌 앵무같다고 할 수 있겠소.
3월18일=푸룽이 말했다.
―전 황제의 동생이 어질어 노나라에 봉하고 노왕이라고 불렀소. 더저우(덕주)내 300여리의 땅이 있기 때문에 덕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소.
―『덕왕은 어째서 베이징에 있지 않고 외지에 있었소』
―황제의 형제가 궐내에 있으면 딴 생각을 할까 두려워 열여섯살이 넘으면 모두 왕으로 봉하여 궐밖으로 내보낸다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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