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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좀 늦은 감이(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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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좀 늦은 감이(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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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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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서는 지난 21일 저녁 청와대에서 이회창 김대중 조순 박태준씨 등 네사람의 정계지도자들과 이른바 5자회담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새로 임명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다섯분이 식사하는 동안 오늘의 조국이 직면한 경제난국타개책을 설명하였다는데 그 회담이 10시 5분까지 장장 2시간 30분이나 끌었다면 회담이 끝날 때까지 임부총리만은 저녁도 먹지 못하고 그 자리에 줄곧 앉아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회담에 참석한 여섯사람 중에도 배고픈 사람이 한 사람은 있었다는 결론입니다.우리는 그 5자회담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국민신당의 이인제 이만섭조가 그 회담 참가를 거부했다는 것이 좀 놀랍긴 하지만 어느 신문에는 불참동기를 「금융위기는 정부와 타후보의 책임」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참·불참을 논할 것도 없이 모두가 대선을 앞두고 득표작업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고 싶은 하나의 「행사」이었지, 결코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회담은 아니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번의 5자회담이 각하의 진정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 활용에 관하여, 금융개혁안 처리에 관하여, 이번 회담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결정짓지는 못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번 5자회담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회담이라는 풀이가 됩니다.

예컨대 한 후보가 대통령에게 APEC일정을 취소하고라도 국난타개에 전력투구를 해야 옳지 않겠느냐고 따졌을 때 또 한 후보가 곧 이를 받아 『출발을 하루 앞두고 취소하면 국제공신력이 추락된다』고 하며 대통령 편을 들었다니 이제 와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발언은 두 후보가 바꾸어서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일 첫번 발언한 후보가 『APEC회의에는 꼭 가셔야 합니다』라고 권유했다면 또 다른 후보는 어김없이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국제회의에 돈 쓰고 가십니까』하고 따졌을 것입니다. 모두가 유권자를 의식하고 투표에 도움이 되는 발언만 하기로 결심하고 참석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각하께서는 공연히 청와대의 식사대만 과다 지출하신 셈인데 메뉴가 칼국수였다면 비용만은 염려를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김영삼 대통령의 일생일대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뜻깊은 회담이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 각하께서 식사가 끝나자 마자 『경제난국 초래에 대해서 책임을 느낀다』고 하신 바로 그 한마디가 우리역사의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각하께서는 한 평생을 정치인으로 어려운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셨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민주화운동의 와중에 아랫사람들은 여럿 감옥에 보내셨지만 당신 자신은 한번도 옥에 갇힌 적이 없으셨습니다. 속칭 「닭장」에 몇시간 계신 적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마는 「닭장」이 「철창」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자금이라는 검은 돈을 두고 말하자면 과거의 야당이 여당 못지않게 썼던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독야청청」만 노래하셨고 그것이 각하의 사정과 개혁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신지요?

청와대에서 각하를 모셨고 뒤에 장관자리에도 앉았던 한 전직 언론인이 각하를 받들고 일했던 1,200일을 회고하면서 각하의 오만과 불손과 독선이 신한국당과 각하의 말로를 이토록 불행하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옛날 임금님들은 비록 천재지변을 당했어도 몸에 베옷을 감고 머리에는 재를 쓰고 꿇어 엎드려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하늘의 용서를 빌었다고 들었습니다.

『과인이 덕이 부족하여…』 백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음성이 그리웠는데 각하께서는 처음 『경제난국 초래에 책임을 느낀다』고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이 나라의 모든 어려움이 차차 풀려나갈 것으로 여겨집니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각하, 책임을 느끼신다니 이 백성의 마음에 그런대로 위로가 됩니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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