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파우스트」(24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는 우리 연극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인간존재의 한계에 도전하는 괴테의 작품을 이윤택은 세계연극제가 끝나고 난 뒤 허탈의 잿더미에 『다시 건설』이란 깃발로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고전은 동시대에 대해 입을 열었다.서막에서 연출자 역의 신구의 대사가 시사적이다. 『내가 무엇으로 저 관객의 가슴을 데울 수 있겠소. 연극이 무슨 수로 이 세상의 힘이 되겠소. (중략) 좋소, 그렇다면 내게 신화를 되돌려 주시오. 신이여- 내게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어진 게 「이미지의 연극」이다. 파우스트를 현혹하는 메피스토의 마력은 기호소비사회의 우상 즉 CF의 이미지, 가상현실 등으로 폭을 넓힌다. 전반적으로 작품을 재구성하고, 대통령선거의 정황을 저자거리 장면에 곁들이고, 처용 구지가 탈춤 등 전래의 신화와 움직임을 담았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연출자 이윤택의 강렬한 체취가 덜한 편이다. 네번째 파우스트 역을 맡은 칠순의 노배우 장민호가 대립항으로 무게를 잡았기 때문이다. 50년 연기생활 내내 신협과 국립극단을 지켜왔고 『배우가 분장하지 않은 얼굴로 대중 앞에 설 수 없다』며 강단조차 거부했다는 그의 고집은 파우스트 박사의 모습 그대로다. 단순화하면 이번 공연은 두 개의 파우스트가 절충하고 있다. 장민호 신구의 진지한 연기와 이윤택의 화려한 볼거리, 가벼움과 무거움, 중세유럽의 냄새와 현대의 한국. 혼돈의 여지가 없지 않아 아쉽지만 관객을 두루두루 만족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주의의 수호자 파우스트는 타락의 끝에서 그레첸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우리 연극은 처벌되었는가, 구원받았는가. 상업주의의 거친 파도와 허상을 좇는 대중 앞에서 어떻게 연극을 할 것인가 라는 준엄한 물음만 다시 남는다.<김희원 기자>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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