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서 6번째 전시/스물다섯,무작정 떠난 독일/간호보조사로 대강대강 살다 우연히 입학한 미술대학/즉흥성과 천재성을 인정받아 함부르크대학 교수까지 ‘출세’/“좋은 엄마·좋은 아내는 과욕/좋은 그림만 그리면 되지요”결핵관리 요원·간호보조사로 독일에 파견, 그리고 국립 함부르크대학 교수. 「변신」을 거듭해온 재독작가 노은님(51)씨가 82년 「공간」에서의 첫 전시 후 여섯번째 전시와 수필집 「나의 고향은 예술」(동연 발행) 발간에 맞춰 다시 서울을 찾았다.
30일까지 갤러리현대(02―734―8215)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는 강렬하면서도 동양적 서정이 물씬한 회화와 세라믹, 함부르크 요하네스교회의 창설치 작품사진 등이 출품됐다. 노씨의 예술세계를 한 눈에 확인 할 수 있는 전시이다.
『비행기가 출발하자 금발의 스튜어디스는 사고가 생겼을 때의 안전사항을 설명하며 구명조끼 입는 법을 보여 주었다. 난 그 옷이 끔찍해보여 꼭 입어야 한다면 맨 나중에나 입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벌써 그 옷을 다입고 점잖게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을 본 스튜어디스는 기절할 듯 달려와 빨리 벗으라고 야단이었다』(「내 고향은 예술이다」중)
서독으로 향하는 70년의 비행기에는 그야말로 「촌놈들」이 가득했고 이중엔 독일어라곤 한 마디도 모르는 스물네살의 반벙어리 간호보조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20년 후 독일 함부르크대의 미술교수가 됐다.
노은님. 그녀는 신데렐라다. 별로 예쁘지 않은 신데렐라이다.
『복이 많은가봐요』 그의 자기분석.
그는 가진 것이 또 있다. 스물세 살 이전까지 그림공부를 전혀 해 본 적이 없는데 실력은 탁월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에게 천재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발현될 때까지 얼마나 외로운 시간이 지났던가.
해방 이듬해인 46년 전주에서 2남7녀 중 셋째딸로 태어난 노은님씨는 열네 살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67년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아버지의 사업도 망해버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이 싫어 도망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다니던 수도의대를 중단하고 면사무소에 딸린 유니세프의 결핵관리요원으로 자원했다. 집을 떠나고픈 마음 뿐 아무 생각 없었다. 의대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9개월 교육받고 무의촌으로 파견됐다. 포천군 가산면이 첫 직장.
그곳에서 사람들의 가래를 채취하는 일을 했다. 기침하는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 가래를 뱉어보라 하고, 갖고 돌아와 검사를 해서 양성이면 약을 갖고 달려갔다. 70년 서독에서 근무할 간호보조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자원했다. 『그땐 독일 아니라 중국이라도 가고픈 심정이었다』 「돈을 빌려 가방도 사고 한복도 한벌 맞춰」 비행기에 올랐다.
반벙어리로 도착한 함부르크 항구병원. X레이, 심전도, 피검사까지 받고 기생충검사에 걸려 약을 먹고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다. 외국인 선원, 창녀, 술꾼, 거지가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병원에서 그저 대강 눈치로 욕조도 닦고 빵도 굽고, 환자들 식사도 날라다 주며 시간을 보냈다.
미술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어느날 감기가 들어 결근을 하자 간호원장이 문병차 찾아왔다. 「할일이 없어」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그릴 줄 알면서 왜 아직 학교도 알아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 야간근무를 하면서 미술대학에 다니는 동료를 통해 티만교수를 소개받았다.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인 폴 클레의 제자인 그는 단박에 노은님에게 매료됐다. 73년의 일이었다. 교수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다음 학기 입학생으로 선발됐고 학교에선 만기된 여권문제도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7월부터 학교에 다녔다.
미술대학에 입학하자 정신이 없었다. 다들 알지 못하는 추상을 그리고 있었고, 교수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데생을 잘하는 옆의 학생에게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연필이나 제대로 깎으라』고 핀잔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도 고민은 계속됐다.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그리기 시작했다. 교수는 쓰레기통을 뒤져 그림을 찾아내선 『이렇게 그려야 한다』고 했다.
『네 그림에 있는 즉흥성은 다른 이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면 너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무 의미없다』 1년 동안 가르친 티만교수가 퇴임을 앞두고 한 충고였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실존주의자 카이 수텍 교수와 만나 5년간 그에게서 배웠다. 테마는 자연. 교수법은 없었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보고, 다시 그림 그리는 일이 반복됐다. 80년 후반부터 시간강사를 시작했고 90년에는 함부르크대학의 교수가 됐다. 「훌륭한 작가」를 최고의 교수감으로 꼽는 독일 미술대학 풍토에서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동양의 정신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고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기간 중에는 장학금과 상도 많이 받았다. 94년에는 외국학생과 교수를 모아 강의를 하는 국제서머아카데미 「펜티멘트」의 학장이 됐다.
그는 정말 출세했다. 그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일까. 독일로 귀화하는 일일까, 아니면 수리한 새집에서 남편을 맞이하는 일일까.
『그냥 좋은 그림이나 그리면 되지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좋은 화가,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려고 하는 여자는 정말 욕심장이」이다. 자신은 좋은 화가가 되는 일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결혼은 안하겠다고 한다. 함께 방한한 동료교수이자 남자친구인 게하르트 바취가 곰꼼히 돌봐주는 데도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것 같다. 자신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어디 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이 받았던 월급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저금이라곤 생전 해본 적이 없으며, 그렇다고 남에게 손 벌리기도 싫어한다. 그는 넘치는 천재성과 부족한 사회성을 특성으로 가진 소녀였다. 여전히 쉰한살의 소녀였다.
◎노은님 작품세계/모든 살아있는 자연물 대상/표현주의의 시원한 맛과 동양적인 멋의 결합
노은님씨 작품의 주제는 세상을 이루는 4대 원소(물 불 흙 공기)이다. 바닷 속 물고기, 하늘의 새, 숲속의 짐승 등 살아 있는 자연물이 모두 작업의 대상이다.
「독일의 표현주의와 동양의 명상을 잇는 다리 같은 시적인 그림」이라는 독일 미술계의 평처럼 그녀의 작업은 과감한 생략과 명징한 화면이 독일 표현주의의 시원한 맛을 닮았고 구겨진 한지와 먹선을 연상시키는 붓끝은 동양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당집의 붉은색, 단청의 파란색을 연상시키는 풍요로운 색감은 한국에서는 물론 독일에서도 인기가 높다. 주둥이가 긴 새, 서로 엇갈리는 두 마리 물고기, 검은 색 백조, 나뭇잎으로 만든 사람의 형태는 때론 선명하게 때론 희미하게 화면 안에 나타난다. 『술을 마시면 술은 사라지고 말이 늘어난다』는 함부르크대 미술사교수 게하르트 바취씨의 설명처럼 작가는 자연의 구성요소를 안에서 삭이고 또 삭여 결국 아이 같은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이런 「삭힘의 미학」(작가는 이를 일컬어 김치를 먹고 화장실에 가서 배설물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은 그래서 이국 땅에서 그의 작품이 공통어로 인식되는 배경이됐다.
아이같은 그의 그림의 기초는 타고난 데생력. 70년 「물감이 아까워」그려본 풍경화는 보는 이마다 깜짝 놀랐을 정도로 그는 탄탄한 기초실력을 갖췄다.
노씨의 최근 작업은 교회의 스테인드글래스. 98년 3월4일 125주년을 맞는 함부르크의 요하네스교회가 마련한 공모전에서 노씨는 쟁쟁한 대가 5명을 제치고 선발됐다. 기독교의 상징인 물고기, 사람과 동물, 사계절을 소재로 했다. 원죄, 전쟁, 낙태 같은 인간의 문제와 구원을 제시해야 하는 교회장식 작업은 비기독교도인 그에게는 부담스럽기도 할 터. 하지만 그는 『사람 사는 것 다 같은 거지요』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을 위한 구원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폭넓은 입장에 수용되는 것이다.
동물이나 사람 얼굴을 귀염성 있는 세라믹 작업으로 옮기기도 한 노씨는 앞으로 이 작업에 좀더 빠져 볼 생각이다. 『제 뜻에 맞춰주지 않으면 갈라져버리고 비틀려버리는 성질 강한, 잘 삐치는 애인같은 흙에 좀 더 맞추고 싶은 생각』때문이다. 장난 같은 도자(도자), 아이 같은 그림에 빠지는 그는 자신과 비슷한 피카소, 사이 톰블리 같은 작가들을 좋아한다.
『살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왜 수천년전 죽은 로마인의 석고데생을 하느냐』는 노씨. 그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오늘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성공담은 동시에 한국미술 교육의 현실을 반성하게 만든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약력
▲46년 전주 출생
▲66년 수도의대 입학 직후 자퇴
▲67년 9개월간 간호보조원 교육후 포천군 면사무소서 결핵관리 요원으로 근무
▲70년 서독에 간호보조사로 파견.
▲73∼79년 병원서 야간근부를 전담하며 함부르크대서 수학
▲79년 「자취남긴 그림들」전 (함부르크)
▲82년 함부르크 미술장학금, 본 미술자금위원회 장학금, 「공간」(서울)서 전시
▲86년 「4개의 주요 원소들」전 (설치와 퍼포먼스, 함부르크)
▲86년 원화랑 개인전 (서울)
▲90년 국립함부르크대 조형미술대학 교수
▲94년 함부르크 「펜티멘트」 국제서머아카데미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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