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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엄마들/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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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엄마들/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7.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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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다녀오겠습니다』 외치고 문을 나설 때 어느 어미가 『잘 다녀오라』인사하며 하루의 평안을 빌지 않으리오. 그들이 돌아와 밝은 얼굴로 어미 품에 안기면 어느 어미가 또한 고마워하고 신통해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정말 평안히 다녀왔는지, 별 악의는 없다하더라도 제 친구 어느 여린 마음에 금이 가는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같은 아파트 위아래층에 사는 어느 두 집 아이들의 실화다.

『넉넉이 어머니 이런 말씀해도 될까요?』하며 한동안 말문이 열리지 않던 은숙이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넉넉이가 요새 우리 은숙이를 심심치 않게 골리는 모양이에요. 여북하면 학교도 가기 싫대요. 넉넉이가 착한 아인 줄 저도 알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몰라요. 넉넉이가 제 짝과 한 패가 되어서 은숙이를 못살게 군대요. 저번에는 앉으려는데 살짝 의자를 밀어내 땅에 펄썩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고, 엊그제는 의자에 흠뻑 젖은 걸레질을 해서 치마가 온통 오줌싼 것처럼 젖기도 했대요. 그러면서 「흥 공부만 잘하면 제일이냐」며 씩씩거리까지 하더래요. 하지만 넉넉이를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저희 애가 뭘 또 어떻게 잘못했는지는 저도 모르니까요. 이런 말씀으로 속상하게 해 죄송해요』

넉넉이 엄마는 공부보다는 착한 아이가 되기를 늘 바라왔고, 넉넉이가 그런대로 아이치고는 꽤 사람다운 줄로만 믿었던 터라 무안하고 미안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해요.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은숙이 어머니 용서해주세요. 제가 타이르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은숙이 좀 달래주세요』하고 빌었다.

넉넉이가 그날도 은숙이를 또 골리고는 재미가 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넉넉아! 너 엄마 딸이지? 엄마가 너를 믿고 너를 기대해도 되겠지? 엄마는 네가 꼭 일등을 하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기기만 바라지는 않아. 너 요새 혹 남을 골리거나 남을 못살게 굴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엄만 왜 그런지 걱정이 된다. 네가 혹시 잘못 생각해서 네 친구를 골렸다면 엄마한테 다 말해봐』

넉넉이 어머니는 솟구치는 분을 겨우 가라앉히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동안 가만히 있던 넉넉이는 『엄마 은숙이가 일등만 하고 나는 자꾸 그애에게 지고 하니까 샘나고 약이 올라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되었어요. 엄마 다시는 안그럴께요. 용서해주세요』라며 모든 저의 허물을 낱낱이 고해 바치고 펑펑 울더라는 것이다.

『난 네가 내 딸인 줄 알았는데 넌 내 딸이 아니구나. 엄만 너무 놀랐다. 어린 네게 그런 몹쓸 마음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엄마는 또 용서를 비는 넉넉이에게 『넌 내딸이 아니야! 당장 나가버려! 내앞에 나타나지마!』라며 소리를 질렀다.

넉넉이가 기를 쓰고 매달리며 애원하자 『네가 은숙이보다 모든 면에서 못하기만 하니? 혹 네가 그 애보다 나은 점은 없니? 혹 춤이나 그림이나 노래도 그 애가 뛰어나기만 하니? 그 애가 모든 면에서 다 뛰어날 수도 있지. 그렇다고 제가 못미친다고 해서 남을 골려도 되는 거니? 하느님은 사람마다 남다르게 만드셨단다. 너와 그의 얼굴이 다르듯 재주도 다르게 주셨을거야. 너도 남과 달리 받은 재주를 갈고 닦아야지! 네가 정 잘 못해서 미안해 죽고 싶거든 당장 그 애네 집에 가서 대문에 꿇어앉아 그 어머니와 은숙이에게 빌고 용서해달라고 하고, 용서를 받거든 집으로 오고 용서를 받지 못하거든 엄마 딸이 될 수 없으니 집에 올 필요 없어!』라고 엄마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넉넉이는 저녁시간이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얼마후 그 집에서 전화가 왔다. 『넉넉이 엄마! 어쩌면 아이를 그렇게 순진하게 잘 기르셨어요. 넉넉이가 우리집 벨을 누르더니 땅에 꿇어앉아 눈물 뒤범벅이 되어 흑흑 흐느끼면서 비는 거예요. 「아주머님 용서해주세요. 은숙아 용서해줘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그럴께」비는 모습이 너무도 기특하고 착해서 은숙이와 저녁먹여 지금 막 보냈어요. 둘이 같이 갈 거예요. 이제 더 친해질 거예요. 진작 연락 못드려서 죄송해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맹랑한 짓에도 놀랐거니와 매서운 그 어머니의 자식교육에 또한 고개가 숙여졌다. 넉넉이를 아찔한 순간에 바로잡고 은숙이와 넉넉이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젊은 두 어머니의 슬기에 소리없는 박수를 보낸다.<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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