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의자·화분·아크릴판 이용/반복해 붙인 필름으로 공간감많이 소비하고, 많이 생산하는 현대사회의 특성은 작가들에게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돼왔다. 매우 중요한, 하지만 식상하기 쉬운 이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들에게 표현 방식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작가 이기봉(40)씨는 이런 문제를 나타내는 방법론을 탐색한다. 국제화랑에서 전시되는 그의 작품은 작은 일상을 소재로 채용, 나직한 목소리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 낮은 목소리는 충격 대신 공명의 힘이 있기에 그는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는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 혼성전에 말(마)을 소재로 한 「채식주의자」를 출품한 그는 21일부터 12월11일까지 국제화랑(02―735―8449)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소파나 의자 같은 생활 집기, 화분이나 어항같은 장식물과 글자가 빽빽이 적힌 아크릴판 등을 소재로 활용했다. 패널에 반투명한 비닐 필름을 붙이고 여기에 그림을 그려넣는다. 그리고 다시 필름 붙이기와 그림 그리기 작업을 반복, 완성된 그림에 입체감을 주는 래커칠을 한다. 제각기 다른 그림의 필름을 반복해 붙였기 때문에 공간감이 살아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창호지 저편으로 일상의 사물을 보는 느낌을 준다. 보일듯 말듯. 그것은 사라지는 것, 생성되는 것의 애매한 경계이며, 그 경계엔 자연과 인간, 인공물과 자연물이 함께 있다. 너무 많이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않는 우리 창호문화의 적절한 중용의 정신을 닮았다.
『생산되는 사물이 너무 많아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좀더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창조적인 것들이 생산될 것이다』
일련의 설치작업 「검정 잉크―사치스러운 진술」은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를 조롱했다. 전시장 한켠 10여평을 꽉 채운 글씨가 적힌 패널, 물감이 든 항아리, 그리고 반대편에 놓인 반투명 패널을 통해 보이는 물고기는 「범람하는 잉크의 시대」(글자는 문명, 잉크는 그 자원을 의미한다)와 이에 대비되는 생명현상을 이야기한다. 원형질을 연상시키는 「긴 꼬리 긴 여행」, 소파의 다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짧은 안락의 사라짐」같은 평면작업도 주제를 잘 표현했다. 평면, 조각, 설치 다양한 표현방법을 이용하는 이 작가는 서울대미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중. 「서울 ’80」, 「로고스 파토스」, 「레알리떼」 등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야기한 주요 동인전과 91년 국제카뉴회화제에 참가했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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