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놀라에게 「드골의 기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96년 8월13일 외신을 통해 포르투갈 전 대통령 안토니오 데 스피놀라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느낀 감상이었다. 당시 1단기사로 처리된 유럽 소국의 한 전직 대통령의 부음에 특별한 감회를 가졌던 것은 그의 등장과 침몰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기 때문이었다. 스피놀라는 살라자르-카에타노로 이어지는 포르투갈의 50년 파시스트체제를 무너뜨린 74년 4월25일 「꽃의 혁명」의 주역. 「포르투갈의 드골」로 불리던 그는 참모차장으로 체제내 인물이었음에도 불구, 「포르투갈과 그 장래」라는 소책자를 통해 정치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가 전격 해임됐다. 군대는 봉기했고 진주군에 리스본시민들이 붉은 카네이션을 뿌리며 환영하는 가운데 스피놀라는 국가 최고지도자로 수직 상승했다. 그것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페텡원수와 결별하고 반나치항쟁을 주도, 단번에 국가적 지도자로 부상한 드골의 정치적 행로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보수성향의 그는 그러나 좌파성향의 군 소장장교들과 반목한 끝에 대통령 취임 5개월만에 사임했다. 이 역시 44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파리에 개선한 뒤 46년 정치상황에 불만을 품고 사임한 드골의 「선택」을 상기시켰다. 자신의 향리에서 때를 기다리던 드골에게는 재복귀의 기회가 왔지만 「포르투갈의 드골」에게는 그런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12·18 결전」이 3자구도로 정착해가면 지난해 이맘때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두 학자출신 정치가가 생각났다. 「무임승차」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정치권 진입 초기 큰 각광을 받았던 두 사람중 한사람은 「나의 때가 아니다」라며 일찌감치 물러섰고 다른 한 사람도 「정치현실에 불만이나 그것을 바꿀만한 힘이 없다」며 역시 무대 전면에서 발을 뺐다. 그들이 우승열패의 다윈법칙에 따라 걸러진 「열성」인지 아니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구축된 「양화」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모두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현재의 「정치 블랙홀」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그들의 처신에서 때를 기다리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그들의 미래는 「스피놀라」일까 정치권에 비켜선채 「오만하게」 자신의 때를 기다리던 「드골」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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