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벼슬 물리치고 문수원 지어 살며 은거/“흠모하던 고려 예종이 수차례 다내렸다” 중수비에 기록 남아춘천 소양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15분 가량 물길을 헤쳐가면 봉우리 다섯개가 부챗살처럼 펼쳐진 오봉산(779m)과 그 아래 청평사가 나온다. 청평사 아래 구성폭포의 넓직한 푸른 못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바위는 온통 단풍잎으로 덮혀 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퇴계 이황(1501∼1570), 겸재 정선(1676∼1759), 다산 정약용(1762∼1836) 등 당대의 내로라는 거물들이 이곳에서 한잔 차를 즐기곤 했다.
청평사 주지였던 차승 허응당 보우(1515∼1565)는 여기서 중종(1506∼1544)과 인종(1544∼1545)의 왕비들에 대한 영혼식에 차를 올리고 게송을 지어 바쳤다. 하지만 청평사라면 고려때 청평거사 이자현(1061∼1125)을 빼놓을 수 없다. 절 이름이 그의 호에서 왔고 지금도 절에 남아있는 연못(영지)도 그의 솜씨다.
이자현은 29살에 대악서승이라는 높은 벼슬을 던지고 청평사로 들어와 은거해 버린다. 인척인 이자겸(?∼1126)의 난으로 몰락하기까지 이자현의 집안은 근 100년간 왕실 뿐 아니라 당대 권문세가와 거미줄같은 혼맥을 맺어 국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자현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세딸을 모두 고려 문종(1046∼1083)의 왕비로 보냈다. 그 중 인예태후는 제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을 낳았으니 그 영화가 어떠했으리라는 상상이 간다. 이자겸도 딸을 여럿둬 그중 한명은 16대 예종의 비가 되어 17대 인종을 낳았고 나머지 딸 둘은 인종의 후비가 되었다.
이자현은 일찌기 급제하여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인물이었다. 이인로(1152∼1220)는 파한집에서 이자현에 대해 「재상의 문에 몸을 일으켰으나 뜻은 늘 자하에 잠겼다. 복술사 은원충를 따라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청평산이야 말로 둔세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이곳에 들어가 문수원을 꾸미고 살았다」고 적었다. 이자현이 은거에 들어간 것은 가문과 세태에 대한 염증과 저항때문일 것으로 사가들은 보고 있다.
이자현은 예종으로부터 깊은 흠모를 받았다. 왕은 여러번 조서를 내려 이자현을 불렀으나 그는 『처음 도성문을 나올때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서하였으니 감히 조서를 받을 수 없나이다』며 한사코 거절하였다. 여러번 거절하다 결국 예종 12년 9월 남경(지금의 서울)에서 왕을 만난다.
『도덕 높은 노인을 사모한지 오래 되었은즉 자리에 앉아 우선 차부터 들구려』 평소 차를 즐겨 마셔온 이자현을 위해 예종은 미리 차를 마련해 놓았다. 두 사람의 은근한 대화는 해가 기울도록 이어졌다. 삼각산 청량사에서 이자현을 두번째 만난 예종은 『몸을 닦고 천성을 기르는 묘법이 무엇인지 듣고 싶구려』하고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성을 기르는 방법은 욕심을 적게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나이다』는 대답을 들었다. 예종은 이자현이 은거를 그만두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그를 포기하면서 차 향과 법복을 주어 은총의 뜻을 표시하였다.
지금은 부서져 조각만 남아 있지만 이자현의 자취를 알리는 중요한 기록이 그가 세상을 떠난 그해(1125년·인종 3년) 8월에 만들어 세운 「문수원 중수비」다. 앞면에는 문수원을 중수하게 된 내력과 함께 왕이 이자현을 위해 여러차례 차를 내렸다는 내용이 세차례나 나온다. 뒷면에는 「청평산거사 진락공지문으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찬향반 갈음명다 묘용종횡 기락무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그동안 일부만 전해 왔으나 지난 90년 서지학자인 박영돈씨가 비문 탁본을 입수해 완전보완할 수 있었다.
청평사는 고려초 광종 24년(973년)에 백암선원으로 창건됐다. 문종때 강원도 감창사로 이곳에 온 이자현의 아버지가 중수해 보현원으로 불렀다. 그런 인연으로 이자현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그의 호를 따 청평사로 바꾸게 된다. 그가 머문 37년간 청평사는 거사선의 요람으로 또 왕실의 기도도량으로 나라밖까지 이름 높은 명산명찰이 된다. 이자현은 계곡 명당자리에 집과 정자를 10여채 짓는다. 그의 호가 된 식암은 좌선삼매에 들던 곳이다. 지금의 적멸보궁으로 가는 사잇길에 청평선동이란 글자가 새겨진 협곡을 지나는 자리에 따오기 알같은 암자, 곡란암을 짓는다. 곡란암은 두 무릎을 모으고 앉아야 할 만큼 작았다. 그 안에 들어 가기만 하면 며칠이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자현의 부도는 그가 직접 만든 고려식 정원인 영지 아래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부도는 세월이 지나면서 지대석과 몸통, 옥개석의 이가 어긋나 있지만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외롭게 서 있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알기쉬운 차입문/좋은 차관은 물 잘나오고 절수 잘되어야
차관을 고를 때는 찻물이 잘 나오느냐를 첫번째로 살펴봐야 한다. 부리부분에서 물이 깨끗하게 끊어지는지 이른바 절수 여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물이 찔찔 나오면서 부리를 타고 흐르는 것은 차관의 구멍이 막혔거나 차관과 부리 크기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관으로 쓰였을지 모르는 옛날 주자를 보면 한결같이 구멍이 하나로 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 차호를 보면 콩알만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홍차를 우려내는 티포트도 예외 없이 구멍이 하나이다. 그 이유는 중국 차호는 잎이 빠져 나오지 않을 정도의 찻잎, 그러니까 잎이 퍼지면 4∼5㎝가 넘는 대옆종의 차를 우려 마시기 때문에 거름망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홍차는 따로 스트레이너라고 부르는 찻잎 거름망으로 잎을 미리 걸러낸다.
우리나라 차주전자 차관은 부리 앞부분이 도톰하게 나와 있는 것들이 많다. 벌집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망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름망을 달기 위한 것이다.봉망이 반대로 차관 안쪽에 작은 혹처럼 달려 있는 경우도 있다. 유의하여야 할 점은 차관은 언제나 청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차관을 깨끗이 씻어서 보관해도 안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은 거름망에 박힌 찻잎 부스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름망을 무작정 크게 만들면 작은 찻잎이 우르르 딸려 나오게 된다. 그래서 차를 우려낼 때 부스러진 찻잎이나 작은 찻잎이 같이 딸려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봉망의 구멍을 너무 작게 하면 오히려 구멍이 막히며 차를 우려내는 시간을 지연시켜 차맛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된다.
옛 선조들은 차를 우려 마실 때 한약을 짜듯 천으로 찻잎을 걸러 마시기도 하였다. 그 지혜를 본받아 작은 조롱박 한쪽을 켠 뒤, 삼베나 명주로 거름망을 만들어 차를 우려낼 때 밑에 받쳐서 찻잔에 차부스러기가 들어가지 않게 했다. 조롱박 스트레이너인 셈이다. 서구의 홍차용 스트레이너가 은으로 요란한 꾸밈을 하여 장식적인데 비해 조롱박 스트레이너는 소박하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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