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좁고 괴석 많은 여량홍/“강 서쪽엔 관운장 사당” 기록/안전통행위해 당시 대규모 준설/이젠 폐하되어 한틀 비석만 남아2월26일 밤 최부는 후아이안(회안)성 서문 밖 운하 건너편, 회음역에 도착했다. 뿌연 운하 너머로 한신의 고사가 얽힌 표모사와 과하교가 보인다. 표모사는 굶주린 한신에게 밥을 준 빨래꾼 아주머니를 기리는 사당이고 과하교는 대망을 품은 한신이 동네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간 수모를 겪은 장소이다. 초한지의 현장이 눈앞에 다가왔다. 한신의 유적과 당나라 때 문통탑, 서유기의 저자 우청언(오승은)의 고택과 묘소 등이 후아이안의 명소다. 물길이 바뀌어 주운하가 서쪽에 따로 있어 찾는 이 없는 조용한 수로에 폐기 직전의 작은 배 두세척만이 쓸쓸하게 낮잠을 잔다. 당시의 한 구절이 화제로 제격인 풍경이다. 「야도무인주자횡(사람없는 밤 나루터에 빈배만 출렁인다」
후아이안은 지금은 지방도시지만 당시에는 남북칠성의 조운중심지로 대도시였다. 중국의 생명선 운하를 주름잡는 조운총독 조운총병 하도총독 등 대관이 주재했고 중국 제일의 염업, 조선업(명대 유일한 관영조선소에서 연간 500여척의 배를 건조)으로 흥청거렸다.
한국인으로서는 더더욱 잊어서는 안되는 고장이다. 당나라 때 「신라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라방에서 일본승려 엔닌(원인)을 보살펴 준 신라인 이름이 하나 남아 있다. 통역관 유신언. 엔닌의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만 등장하는 평범한 신라인. 후아이안 동쪽 롄수이(연수)현에도 신라방이 있었다. 장보고와 더불어 무명을 날린 정년의 활동지였다. 또 장보고의 「대당매물사(중국무역단장)」였던 최운이 장보고 실각후 여기로 망명, 엔닌과 극적인 해후를 하기도 했다.
현재 신라방 유적은 아쉽게도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 신라방이 있었다는 기록은 금세기 초 발견된 엔닌의 일기뿐이다. 각별한 장보고 사론을 쓴 최부가 후아이안, 쉬저우(서주)를 지나면서 어떻게 장보고와 신라인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을까. 무척 아쉽고 의아하게 느껴진다.
중국혁명가 저우언라이(주은래)의 고향 역시 후아이안이다. 98년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관을 대대적으로 짓고 있다.
최부는 후아이안을 떠나 수첸(숙천), 뤼량홍(여량홍)을 거쳐 쉬저우(서주)에 도착했다. 뤼량홍은 대운하 중에서 최악의 난소이다. 좁고 얕은 수로에 급류가 흐르고 강바닥에는 무수한 괴석이 깔려 조난사고 다발지역이다. 명나라 정부는 특별히 이곳에 「공부분사(건설부 출장소)」를 두고 안전통행을 위해 여러 차례 준설작업을 했고 항시 인부 1,763명을 배치해 왕래하는 선박의 견인작업을 담당케 했다. 『강서쪽에 관운장, 울지경덕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최부의 기록은 원나라때 명필 조맹부가 1313년에 쓴 「여량신묘기」의 『강 서편에 사당을 세워 관운장과 울지경덕을 모셨다』와 맞아떨어진다. 최부의 기록은 언제나 이렇게 정확하다.
쉬저우에 도착한 우리들은 길을 되돌아가 뤼량홍을 답사했다. 운하 길은 따로 뚫려 폐하가 된 뤼량홍. 봉관산 위의 「낭산저격진능원」을 찾았다. 국공내전(중국은 해방전쟁이라 부름)때 희생된 군인들 묘지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묘역 오른쪽 담 귀퉁이에 옮겨 세워진 옛 비석을 발견했다. 뤼량홍 준설작업을 기려 1545년에 세운 「소착여량홍기」비석이다. 이부시랑 서계가 짓고 서화가로 이름난 문징명이 쓴 유명한 비로 높이 2.6m, 너비 1.02m, 글자는 모두 797자. 비문에 따르면 이곳을 통과한 배가 연간 3만1,143척, 실어나른 양곡은 무려 400여만석이나 됐다. 한 틀의 비석으로 그 옛날 황금시대 운하가 더욱 바짝 우리 앞에 다가왔다.<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중국 쉬저우·서주에서)>박태근>
◎최부의 장보고사론/“반정으로 신무왕 옹립 불후의 업적/국왕이 자객보내 암살한 것은 잘못”
역사 속의 장보고는 빛과 그림자가 너무 대조적이다. 청해진으로 망명해 온 김우징을 보호하고 후원해서 신무왕에 즉위시켜 글자 그대로 반정 일등 공신이 된 것을 「빛」이라 하면 뒷날 문성왕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것을 「그림자」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근의 「동국사략」, 「삼국사절요」 등 유수한 국정사서들의 유권해석은 「빛」부분을 붓을 모아 찬양하고, 「그림자」에 대해서는 모두들 외면하며 노코멘트하고 있다. 마치 변호인 한 사람도 없는 재판과도 같다. 비록 왕조는 다르지만 반역은 대역죄라 사평을 쓰기가 매우 껄끄럽다. 변호하자니 거북하고 단죄하자니 장보고가 억울해 자연 기피한 것이다.
그러나 최부는 역사의 사각지대에 들어가 일찍이 그 아무도 하지 못한 장보고를 변호하는 불세출의 사론을 썼다. 즉 장보고의 역사 변호인 제1호가 된 셈이다. 최부는 먼저 김우징의 청해진 망명을 수용하고 보호한 점, 그 뒤 반정을 일으켜 신무왕으로 즉위시킨 것을 들어 장보고의 불후의 업적을 평가했다.
다음 장보고의 반역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국왕의 약속을 저버린 「계약의 불이행」을 규탄했다. 장보고가 유죄가 확실하면 국가 공권력을 발동해 처벌하고 만일 죄의 구성이 명백하지 않으면 전공을 정상 참작해 사면하자는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견해이다.
장보고의 반역설은 설만 있지 실태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증거불충분으로 죄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증거불충분설은 근대법리에도 잘 부합한다. 국왕이 시킨 암살(자객 염장을 동원해 속임수를 쓴 것)의 부도덕성을 준열하게 고발했다.
최부는 맺음말에서 권근이 「동국사략」에서 문성왕이 장보고를 죽인 대목을 「주」자 대신 「살」자로 쓴 용어법을 춘추미의라 해, 올바른 역사해석이라고 극찬한 것이다.
◎표해록 초/“물살이 세어지면서 노기가 충천하고 풍랑소리는 우뢰와도 같았으며…”
2월27일=양주위 백호 자오지안(조감)이 후아이안 운하를 지나면서 말했다. 『구산에는 원숭이처럼 코는 오그라지고 이마는 튀어나왔으며 몸뚱이는 청색이고 머리는 백색이며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신물인 듯한 동물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소. 전설에는 대우 당시 물을 다스릴 때 이 동물을 굵은 밧줄로 묶어 여기에 살게 하여 회수가 잠잠해졌다고 하오. 이 동물의 형용을 그려 가지고 있으면 회수의 환난을 면할 수 있다 하오』
3월1일=비주국은 옛날 섬자국으로 동쪽에 있는 섬자의 사당은 공자가 정치에 대해 물었던 곳이다. 서쪽의 애산은 노공과 제후가 만났던 곳이다. 항저우(항주)이북은 끝없는 평야였다. 간혹 산이 보이기는 했지만 양자강 이북은 구릉하나 없는 평야가 비주에 이르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산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았지만 우리나라 남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3월2일=여량소홍에 도착하여 대나무로 만든 줄로 배를 위로 끌어올려 니타사를 지났다. 여량대홍에 도착했다. 홍은 여량산 사이에 있었다. 홍의 양 옆 물밑에는 돌이 어지러이 깔려 있고 물 위로는 깎은 듯한 바위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강물이 이 기슭에서 돌아나올 때는 물살이 걷잡을 수 없이 세어지면서 노기가 충천하고 풍랑소리는 우뢰와도 같았으며 지나는 사람이 넋을 잃을 정도로 전율하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작은 거룻배라 하더라도 대로 꼰 뱃줄로 끌어야 하는데 소 열마리의 힘이 있어야만 가능해 보였다.
3월3일=쉬저우는 과거 팽씨의 나라이기도 하였으며 항우가 서초의 패왕으로 자처하며 도읍을 정한 곳이기도 하다. 성의 동쪽에는 호성제가 있었고 황루 옛터도 있었는데 황루는 소식이 지은 것이다.
3월4일=배를 끌어 체운소에 이르렀다. 체운소 앞에는 기봉문과 목욕당이 있었다. 강에는 배를 띄워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대부교라 부르고 있었다. 배의 돛은 마치 가시처럼 보였는데 배가 지날 때는 두 배 사이를 벌렸다가 배가 지나 간 다음에는 다시 다리로 환원됐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