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후 우리나라 최대의 문화재 발굴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이 있은지 25년만에 당국은 보존을 이유로 왕릉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언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발굴에서부터 관리, 보존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잘못됐다고 질타하고 있다. 사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과 왕비 시신의 머리에 씌였던 금제관식과 귀걸이 등을 비롯 108종 3,000여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가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는 백제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 했다.이와같이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발굴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으나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급히 서둘러 끝냄으로써 졸속이라는 오명까지 쓴 발굴이었다. 당시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필자는 지금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두고 두고 후회하면서 다시는 이러한 졸속발굴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며 이를 교훈으로 삼고 있다.
매장문화재 발굴은 문화유산의 파괴를 의미한다. 때문에 문화재의 보존·보호차원에서 본다면 고고학 즉 학문을 위한 발굴이든 구제를 위한 긴급발굴이든 그것은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일 수 밖에 없다. 역설적이지만 무령왕릉의 경우 발굴 종료와 동시 영구히 폐쇄했다면 오늘날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우연이긴 해도 발견되었기에 조사가 따랐고 발굴 후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보호, 보존해 온 것도 사실이다.
당국은 70년대 초반의 열악한 경제여건에서도 무령왕릉의 중요성때문에 공개시설을 마련해 일반인들의 관람이 가능하도록 했고 아울러 출토된 유물은 공주박물관을 신축하여 모두 전시,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수를 현지에서 피부로 느끼도록 했다. 일본의 경우 고송총 벽화고분을 70년대 발굴조사하고 보존에 필요한 과학적 자료를 얻기 위해 무덤 내에 장비를 갖춘후 폐쇄하여 일반인의 관람을 막았지만 무령왕릉의 경우 우리는 반대로 공개를 택했던 것이다.
무령왕릉의 규모는 벽돌방(현실)의 면적이 11.4㎡(약 3.5평)에 지나지 않고 또 복도같은 널길(연도)이 마련되어 있어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더라도 널길을 통해 벽돌방 내부를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발굴된 상태의 무덤내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80년대에 유물이 출토될 당시의 상태로 모형관을 왕릉 주변에 만들어 공개했다.
발굴 유구의 공개, 출토유물전시를 위한 박물관 건물 신축, 현장이해를 돕기위한 모형관 건립은 우리가 문화재를 발굴하여 어떻게 보존해야 하고 어떻게 사회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사후 정비하여 공개하면서 부단히 관찰하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대책을 세워 나감으로써 한 단계 뛰어 넘어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89년에는 무덤 벽의 결로현상과 곰팡이를 제거하는 보존처리를 했고, 지난 해에는 왕릉 내부 정밀진단을 실시하여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견되면 그에 따른 보존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만약 발굴 후 그대로 폐쇄했다면 연구대상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결국 보존기술의 발전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전문가의 진단에 따라 보존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새로운 모형고분을 만들어 공개할 계획이라니 아연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모형관으로도 충분한데 또 하나의 모형 무령왕릉을 만드는 것은 예산의 낭비일 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보존 기술 축적을 위해 필요한 기자재 확보와 전문가 양성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질타해서 움츠러들게 하지말고 잘하고 있는 것을 부추겨 모두에게 신바람 나는 관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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