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 모퉁이 한 지하전시실에서 조그만 사진전람회가 지난 주에 열렸다. 유명 작가의 예술작업도, 크고 호화로운 상품도 아닌 흑백 영상들이, 수십점 겸손하게 걸렸다. 사진 찍은 이는 차준엽이라는 환경운동가. 여러 해 전 도봉구 방학동에서 800년 은행나무 한 그루를 단식 항거로 지켜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전시장에 붙은 큰 제목은 「환경운동가의 눈으로 본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고, 전시회의 목적은 「자연학교 설립 기금」을 위한 것이다.사진들은 우리가 잊고 지내온 산천의 본래 모습을 살려준다. 강마을의 물안개, 깊은 산 벼락맞은 고목이며 갈아엎은 밭이랑들이 정겹다. 멀리 산 아래 농가 몇 채가 따뜻해 보이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의 숨결과 그에 대한 향수가 사진마다 짙고 깊다.
「이야깃거리도 못된다」는 질문이 문득 나왔다. 저 농가들에서 아기울음 소리가 들려 나올까?
요즘 농촌에 젊은이들이 발붙여 눌러앉지 못하고, 그 때문에 아기울음 소리가 마을에 끊긴지도 오래라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이므로, 아기울음 소리를 말하는 것은 「이야깃거리도 못되는」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떠나가기만 하고, 남는 이는 노인들 뿐이다. 적령기의 어린이들을 잃은 산골 초등학교는 문닫기에 바쁘다.
농촌을 떠나는 인구는 해마다 전체 농민의 5%를 넘는다고 한다. 여전한 이농이고 그 가속이다.
농민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농경지도 줄어든다. 농사를 지어야 할 땅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난개발되고 유흥 향락시설의 터로 변한다.
식량자급률도 해마다 줄어드는 것의 하나다. 자급률 26% 밖에 안되는 형편인데, 연평균 2%씩 계속 떨어진다고 한다. 이 정도면 안보상황이다.
인구와 경지가 줄어들고 식량자급률도 떨어지는 현실에서 늘어나는 것이 있다. 오염이다. 도시에만 환경오염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도 심각하다. 전국 4대강의 수질이 2급수 이하로 떨어지고, 나라 전체의 지하수는 40%가 오염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전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먹는 수도권 상수원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맑은물 대책이다. 최근에는 걸러지지 않는 유독 바이러스가 수돗물에서 검출되었다는 놀라운 보고가, 오로지 대통령선거의 아귀다툼만이 관심사가 되는 천박한 세태에서 외면 당한채 지나쳐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발전 수준을 재는 사회지표에서 식수와 화장실은 언제나 첫번째 항목이자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안전한 식수와 위생시설의 공급률에 따라 그 나라의 선·후진국 여부가 분류된다. 하물며 먹는 물의 안전을 의심받는 상황이라면 「삶의 질」은 입에 담을 계제가 못된다.
우리의 경제규모는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말하는 수준이고, 「부자들의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되었음을 으스댔던 처지다. 「세계화」가 「세계 삼류국가 추락」에 직면하는 지름길이 될수도 있음은 짐작도 못한 채, 「세계일류국가 도약」의 환상에만 젖어 한쪽 기둥이 기우는 것을 외면했다. 세계의 경제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 경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금이 어떤 전환기인지에 대한 현실 인식조차 없었던 결과가 오늘의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사태는 심각하다. 세계의 유수한 언론들이 일제히 한국경제위기의 비관론에 편들고 나선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신뢰의 위기」다. 2000년이 되기 전에 누적 외채 2,000억달러의 세계 제2위 외채대국이 되리라는 어두운 전망보다도 더 위험한 사실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나라, 우리 국민에게 제시된 국가적 명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민이 농촌을 버리는 사회, 대책없이 더럽히고 내버리는 사회, 오로지 입시만 잘 치르도록 가르치는 사회, 어떤 불의한 일을 저질러도 정권만 잡으면 된다고 믿는 사회에는 희망도 비전도 있을수가 없다.
꿈을 주는 나라여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성취해야 할 명제를 제시하는 지도자라야 한다. 헛된 환상을 심어주기 보다 고난에 찬 구국의 길에 기꺼이 따라나서도록 이끌어주는 정직한 지도자를 이번 대선에서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심의실장>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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