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량 보다는 자기조절능력이 판단기준/간경화·영양결핍·뇌손상따른 치매 유발/환자로 여기지않는 잘못된 술문화가 문제50대 초반의 회사원 이모씨. 그는 평소에는 무척 얌전한 사람이다. 말도 별로 없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도 많이 탄다. 흠이 하나 있다면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다. 가끔은 고주망태가 돼 문제를 일으킨다. 며칠 전에도 동네 상가에서 술에 취해 이웃 주민과 시비를 벌이다 얻어 맞았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싸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식구들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네사람에게 창피한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 교육에도 지장이 많다. 이씨가 술을 마신 날이면 식구들은 모두 슬슬 피한다. 보통 때는 소심하고 욕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지만, 술만 마시면 밤새도록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낸다. 식구들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살림을 때려 부수고 아내를 두들겨패기 일쑤이다.
이씨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의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씨는 전문적인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알코올중독 환자이다. 그런데도 본인이나 주위에서 환자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의 잘못된 음주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서로의 벽을 허물고 소속감을 확인하기 위해 마신다. 그러다 보니 개강을 해도 술이요, 시험이 끝나도 술이고, 입사를 해도 술이며, 명예퇴직을 해도 술이다. 기뻐도 술이요, 슬퍼도 술이다. 마셔도 만취해 쓰러질 때까지 계속 마셔야 한다. 웬만한 실수는 「술을 마시고 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용서가 된다. 그러는 사이 하나둘씩 술로 망해 가는 것이다.
◆알코올중독이란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하나의 병이며, 정신과적 치료를 필요로 한다. 알코올중독은 마시는 술의 종류와 기간, 마시는 양과는 관계가 없다. 가장 중요한 진단기준은 술에 대한 자기조절능력이 있는지, 술에 대해 무기력하지는 않은지 여부이다. 가족관계, 대인관계, 직업수행능력 등 심리사회적인 기능이 얼마나 유지되고 있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술기운이 떨어지면 식은 땀이 나고 맥박이 빨라지는 등 금단증상과 함께 술에 대한 자기조절능력을 상실한 경우를 알코올중독이라고 한다. 이 보다는 경미하지만 신체적, 심리사회적 문제가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술을 마시는 경우엔 알코올남용으로 정의한다. 술을 조절해 가며 마시는 사람도 많은데 중독자들은 왜 그렇게 못하는 것일까. 최근의 연구결과 알코올중독은 유전적인 요인이 강하며, 환경적인 요소도 중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알코올중독의 결과
과도한 음주는 심각한 내과적 질환을 일으킨다. 손상되기 쉬운 대표적인 기관은 간과 뇌이다. 간은 알코올을 대사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기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면 간세포가 파괴되며, 그 자리를 섬유질 조직이 차지해 간이 굳어져 간경화가 된다. 또 식욕이 떨어져 식사를 잘 못하고, 알코올의 대사 과정에서 당분과 비타민이 소실돼 심각한 영양결핍을 초래한다. 이런 영양결핍과 알코올 대사물질의 독성 작용으로 뇌가 심각한 손상을 받으면 마치 노망난 노인처럼 뇌의 전반적인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치매」에 빠질 수도 있다. 암 발생과 자살 위험도 높아진다.
이같은 신체적 손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시다 보면 직업도 잃고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기 쉽다. 가족간의 신뢰와 사랑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정불화, 청소년 문제, 범죄, 이혼, 실직 등의 사회문제는 모두 알코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족들은 그들대로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 심각한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된다. 알코올중독은 환자의 몸과 마음 뿐아니라 가족의 안녕과 건강까지도 망치는 무서운 병인 것이다.
◆국내 실태와 대처방안
여럿이 함께 술을 마시고 안주를 잘 섭취하기 때문에 선진국처럼 알코올중독이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인의 알코올남용 평생유병률은 12.06%, 알코올중독은 9.92%로 외국보다 높다. 10명중 1명은 평생동안 알코올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알코올중독은 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신경정신과적인 질환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보기보다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나 폐인, 성격장애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알코올중독 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오해가 불식되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음주문화와 습관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가 술을 잘 마시는 것 자체가 강한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회사에 입사하거나 대학에 들어가면 술을 마시고 흠뻑 취해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아직도 남아있다. 사업을 하더라도 술을 사고 향응을 베풀어야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일부 청소년들에게도 기성세대의 잘못된 음주문화가 전수돼 젊은 나이에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과 농촌지역의 알코올 소비문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술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으면서 점점 알코올중독에 빠져드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과도한 음주를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지는가 하면 국민건강증진법이 제정돼 술에 대한 규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알코올중독 환자의 치료 및 재활시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사회에서 소외돼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알코올중독은 더 이상 개인차원의 문제가 아닌 만큼 범정부 차원의 관심과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알코올중독의 치료/입원·해독후 약물·재활치료 병행
알코올중독 환자가 스스로 술을 끊기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전문적인 치료가 반드시 요구된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들은 대부분 창피하고 부끄럽다며 정신과 치료를 기피한다. 이 경우 환자는 치료시기를 놓쳐 그만큼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가족들은 냉정한 사랑으로 환자를 다뤄야 한다.
술과 관련된 폭력이나 가족내의 갈등이 심해지면 더 이상의 관계악화를 막고 가족들의 휴식을 위해 입원치료가 필요해진다. 치료는 우선 술과 격리시킨 뒤 해독을 하는 게 중요하다. 술을 끊으면 심각한 금단증상이 생기므로 병원에 입원해서 해독치료를 받는 게 좋다. 중독자는 대부분 영양결핍이 동반되므로 적절한 영양공급과 함께 금단증상을 줄이기 위한 정신과적 약물투여를 병행해야 한다. 대개 2∼3주 정도면 해독치료는 마무리된다.
최근 「날트렉손」이라는 약물이 알코올중독 치료제로는 처음으로 미국 FDA(식품의약국)의 공인을 받았다. 이 약은 술에 대한 갈망을 줄임으로써 알코올중독의 재발방지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년초쯤이면 국내에도 도입될 예정이다.
해독과 병행해 술을 끊기 위한 다양한 치료프로그램이 제공돼야 한다. 먼저 환자를 정신과적으로 면밀히 평가한 후 치료계획을 수립하고 개인면담, 교육, 집단치료, 인지행동치료, 환경치료, 심리극 등의 재활치료를 한다. 퇴원 후에도 재발방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협조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알코올중독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정신과 환자가 아니라고 여겨 억울하게 끌려 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 다른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을 빨리 파악하고 이용하려 들기 때문에 정신과에서 일하는 치료진과 갈등이 많다. 따라서 알코올중독 환자만 입원시켜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단독 병동 등 체계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기선완 오산신경정신병원 알코올치료병동장>기선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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