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도둑(세도)들이 다시 활개치기 시작한 건 분명 나쁜 조짐이다. 나라일이 크게 잘못되지 않고서는 어찌 이런 일이 불과 3년 터울로 마치 역병처럼 또 번지는 것일까.지자체 세무담당공무원들에 의한 세도사건이 처음 터진건 94년 9월 인천북구청에서였다. 당시 경력 8년의 구청세무담당 여직원이 우연히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가짜등록세 납세필증 등이 발견된 게 엄청난 세도사건의 첫 실마리였다. 조사결과 그 여직원은 세도행각으로 아파트 네채 등 10억원대가 넘게 치부하고 있었고, 다른 관련자들의 국사범적 범행도 줄줄이 드러났었다.
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얼마나 난리법석을 떨었던가. 그해 12월말 발표된 불과 한달간의 소나기성 감사원 특감결과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특감대상에 오른 전국 259개 시·군·구청 모두에서 빠짐없이 망국적인 세금도둑질이 자행됐고 비리액수가 424억여원에 이르렀으며 고발된 세도만 250명이 넘어 나라를 차라리 「세도공화국」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조세행정이란 안보·치안 등과 함께 가장 중요한 국사중의 하나여서 조세행정의 확립이야말로 국기를 다지는 일이다. 따라서 세도가 날뛴다는 것은 나라기강은 물론이고 공직윤리(이도)가 땅에 떨어져 두루 제구실을 못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국가적 위기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94년에 터졌던 부끄러운 사태가 대통령을 비롯, 감사원장과 총리 및 지자체 등 관련책임자 모두의 철석같았던 재발방지 다짐에도 다시 되살아난 것은 무엇 때문이며, 어떤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94년은 기세 좋았던 「문민」사정과 개혁이 2년을 맞으면서 변질되고 긴장감도 해이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표적사정」이니 「팽」이니 하면서 개혁기운이 한번 깔보이기 시작하자 그만 세금도둑이 활개짓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세도가 되살아나는 건 무능·허약했던 「문민」정권의 말기현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주변을 살펴보면 도둑맞고 있는 건 세금뿐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온갖 소중한 것들이 차례로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등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한번 따져보자. 기아사태로 야기된 경제위기와 외환파동은 현실을 직시하고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의욕을 잃어버린 정권과 정부의 무능탓이 아닌가. 「하면 된다」던 정신과 세계에 이름을 떨친 경제테크노크라트들의 능력은 어디로 가 버렸다는 것인가.
말이 좋아 합종연횡이지 대선을 한달여 앞둔 정치권의 한심스런 야합·영입작태란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세탁소」란 표현이 차라리 알맞을 성싶다. 세탁소란게 뭔가. 땟국이 줄줄 흐르는 온갖 불결한 옷의 종착역이다. 재야민주투쟁 세력과 수구세력의 야합도 모자라 그들을 탄압했던 정보기관출신과 현정권으로부터 사정 당하거나 「팽」당했던 인사들마저 끌어들이고 있다는 오늘의 야권. 탈당한 민주계의 자리를 구민정계 인사들로 채우는가 하면 내보냈던 인사의 복당도 서슴지 않는다는 전여당. 그리고 5·18진압군출신 인사와 철새형 인사도 마다 않는다는 제3당 등이 각각 펼치고 있는 작태야 말로 「비리 정치인 세탁소」라는 오명을 듣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지난 14대때도 의원 299명중 당적을 바꾼 의원이 137명이나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15대 의회는 각 정당마저 땟국을 감추느라 「신」자를 앞다퉈 붙이는 바람에 아마 대부분이 당적을 바꾸는 기록을 세울 것이 쉽게 내다보인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과 윤리와 신념이 있어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흥정과 야합 앞에서 정치적 이념이나 정체성과 의리마저 사라진 듯한 오늘의 「정치세탁소」들로 과연 21세기를 온전히 맞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세도가 줄잇는데 누굴믿고 내각제를 하자는 것일까.
우리들이 지금 도둑맞고 있는게 결코 세금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결국 공무원 사회는 물론이고 정부와 정치권 등이 진정으로 세도의 공범자 노릇에서부터 벗어나는게 세도를 막는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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