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변동 제한폭 일시에 철폐 어렵다면 대폭 확대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부합한다환율이 달러당 999원(매입기준)에 달한 시점에서 당국의 적극적인 외환시장개입이 있었다. 주춤하던 환율이 다시 달러당 1,000원선을 넘어서 버리자 더이상 환율인상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정부 개입의지를 재천명한 듯하다. 이렇듯 일정수준에서 저지선을 설정하고 이것이 무너지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외환시장개입 전략은 과연 가능하고 효율적인가.
먼저 우리의 처지를 보자. 우리경제는 대내외적인 여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자본자유화를 추진하려다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에서 동시적으로 불안정에 직면, 이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부도사태와 자금난으로 탈진상태인 실물부문을 고려할 때 이는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지난한 과제이다. 실물부문의 자금난을 풀기위해 통화를 늘리면서 원화가치의 절하를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책당국은 스스로 균형 또는 저지선으로 설정한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통화공급을 늘리고자 한다. 지금처럼 늘어난 통화가 기업으로 흘러들지않고 금융기관들 사이에서만 맴도는 경색된 상황에서 늘어난 통화공급은 금융기관간 자금거래나 투기적 외환거래의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넉넉지 않은 외환보유고와 원화의 완만한 평가절하를 지지해온 외환정책기조, 그리고 국내금융시장여건과 여전히 적자인 경상수지 등을 고려할 때, 환투기는 오히려 안전한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다 하루 2.25%로 고정된 환율변동폭은 외환투기의 안전판역할을 할 뿐이다. 더구나 거의 모든 외환시장 참가자가 환율의 변동방향에 대해서 동일한 예상을 가지고 있다면(모두 오른다고 생각한다면) 상당기간 외환거래가 중단될 수도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당국이 여러번 고쳐 설정한 환율방어선과 시장참여자들의 예상환율 또는 역외금융시장의 환율간에는 여전히 격차가 있다.
당국은 대체로 무역가중치를 사용한 실질실효환율(물가를 반영한 환율)을 기준으로 한 적정환율을 강조하는 듯 하다. 실질실효환율은 기본적으로 구매력평가에 근거한 개념이다. 그러나 재정환율의 기준이 되는 원·달러환율을 한국과 미국에 국한하여 적용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수 있다. 사상 처음으로 경상수지가 흑자가 돌아선 85년도의 최고환율은 890원이었다. 이후 10여년간 양국간 물가상승률 격차는 연평균 2%이상이었으므로 구매력의 격차를 반영한 환율은 1,100원이 넘어선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반면에 실질실효환율로 계산해보면 기준시점에 따라 905원에서 930원 정도이다. 자본자유화과정에서 낮은 주가수준과 높은 금리를 보고 국내에 유입된 해외자본이 없다면 이미 후자에 접근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물론 대내외 금리차가 큰 경제가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단기환율이 중장기적 균형으로부터 괴리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는 없다. 자본유입과정에서 고평가된 환율을 무리하게 고수했던 멕시코와 일부 동남아 국가의 경험은 타산지석이다. 지금처럼 경상수지 적자가 계산되지 않는다면 적자를 보전하고 외채를 갚기위해 매년 400억달러에 가까운 외자를 조달해야하고 이를 잘 알고 있는게 외환시장 참여자들이다.
따라서 현행 환율변동 제한폭은 일시에 철폐하기 어렵다면 대폭 확대해야 한다. 시장수급에 의한 가격결정은 대개 처음에는 적정수준 이상으로 치솟았다가 점차 균형가격으로 회귀하는 행태를 보인다. 변동제한폭의 확대는 시장참여자들의 예측방향이 같더라도 크기가 다를 때, 단시간내에 새로운 균형가격을 찾아줌으로써 경제전체의 비용을 줄일 것이다. 이 경우, 투기적 외환수요는 오히려 시장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달러당 915원이 무너지고 1,000원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거래비용을 치른 경험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증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가격급등락사태를 맞을 때면 늘상 수요나 공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대처하려했다. 그러나 비용에 비해 효과는 적었다. 오히려 일시적이더라도 충분히 떨어지거나 올라간 가격에서 자생적인 수요나 공급이 발생하고 단시일내에 균형가격을 회복토록 하는 것이 시장원리라는 대원칙에 보다 충실하다고 본다.
최근 실물시장, 증권시장 및 외환시장 등 곳곳에서 가지게 되는 일종의 무력감은 우리경제내 시장기능 상실이나 정책 무용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폐쇄 경제하에서 원용했던 정책수단과 경직적 제도의 효율성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한국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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