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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역할바꾸기’를/효림 보광사 주지(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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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역할바꾸기’를/효림 보광사 주지(아침을 열며)

입력
1997.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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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잠시 일찍 찾아온 추위가 지나가고 나더니, 요즘은 쾌청한 날씨의 연속이다. 이렇게 연일 날씨가 쾌청하다고 나는 철없이 좋아하고 있는데 남쪽 아랫녘에는 초겨울 가뭄으로 농작물이 타들어가고 공업용수가 모자라 공장가동이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엊그제 다행히 촉촉한 단비가 내려 어느정도 해갈됐다고 하니 하늘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고 보면 날씨 앞에서조차도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할 때가 있다.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니 가슴만 답답해진다. 무언가 앞뒤가 꽉 막힌 듯이 그렇게 답답하다. 흡사 음식 먹은 것이 안 내려가고 명치 끝에 체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실로 요즘같이 지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행동하기 어려운 때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대선정국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지금 더욱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자못 본질이 왜곡되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우려가 앞선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나같은 사람은 적당히 균형 맞추기식으로 양비론적으로 말하는 재주도 없다. 이래저래 진짜 말을 해야할 시기에 입이 무거워지고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런 시점에 지난 6일 재야의 원로들을 모시고 「공정선거 민주개혁 국민위원회」출범식이 있었다.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나 중요한 대선 국면에서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일생을 몸바쳐 온 분들이 침묵만 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뜻에서 나선 것이다. 나 역시 그동안 재야활동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인연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욕심 같아서는 이번 대선에서는 북풍도 막아보고 색깔론도 막아보고 그야말로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기여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정치권은 여권은 있으나 여당이 없어졌다고 한다. 차제에 한가지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무리 치열한 정치판이지만 그래도 그것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찌 인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여야간에 혹은 각 후보간에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여유를 가져주길 부탁해보고 싶다. 아무리 정적의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번쯤 상대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해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 겸허한 미덕이 있어야 진정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꼭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상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하게 하겠다는 그런 발상이 오늘 우리 정치를 망치고 있다.

언젠가 문제청소년들을 교화하는 방법으로 「역할 바꾸기」라는 연극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는 엄마가 되어보고 또 엄마는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는 아이가 되어보고, 이렇게 역할을 바꾸어서 연극을 하는 것이다. 이 연극에는 미리 준비된 대사나 각본도 없다. 그저 평소 체험하고 생각했던 것을 상대에게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을 하고 나면 엄마는 아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아이들은 엄마의 잔소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우리 정치에도 이와 같은 역할바꾸기가 있었으면 한다. 우선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입장에 서보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도 정치인의 입장이 되어서 정치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같은 정치인들끼리도 역할을 바꾸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은 공히 나라를 위하여 있고,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하여 정책대결을 하고 서로 국민의 선택에 따라 정권을 잡으라고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번쯤 그 역할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역할을 바꾸고 처지를 바꾸어 보는 것, 이것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개인의 인격에도 매우 좋은 경험이 된다고 한다. 인생을 이해하고 자기 삶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도 여야간에 역할이 바뀌면 정치인은 국민 앞에 더욱 겸손해지고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김영삼정권이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부정못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의 정치권이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하게 썩었다고 하는 것도 부정 못한다. 이렇게 부정부패가 판치는 정치권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한번도 선거를 통해 그 책임을 묻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좋은 기회다. 정말 정치권과 국민이 모두 민주개혁을 위한 좋은 경험을 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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