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부총리 뚝심 돋보여 종합 1위 차지/‘적시정책’ 나웅배 ‘부처간 협조’ 홍재형 1위/6명 대부분 일부항목선 0점 받기도56점에서 69점까지. 문민정부 경제부총리 6명의 점수다. 평균은 61.4점.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오히려 누구나 부끄러워 할 점수다.
문민정부 경제부총리들의 성적표는 경제학교수 경제연구소소장 대기업고위간부 경제부처 국장급이상 경제관료 등 한국 경제를 진단할 수 있는 경제전문가 29명이 매겨주었다.
네오포커스팀은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작성한 설문조사표를 이들에게 제시하고 점수를 매겨줄 것을 요청했다. 설문 조사항목은 ▲조직 및 업무장악력 ▲경제논리에 대한 충실도 ▲경제수석으로부터의 독립성 ▲정책의 적시성 ▲개혁의지 ▲타부처와의 협조정도 등 6개 항목. 인사의 공정성과 청렴성 여부에 대한 조사도 있었으나 객관성이 결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평가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조사항목중 조직 및 업무장악력에 대한 질문은 리더십이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경제논리 충실도와 경제수석으로부터의 독립성, 개혁의지에 대한 질문은 정치권의 압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웠고 소신이 있었는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책의 적시성 여부와 타부처와의 협조정도는 경제정책입안 및 실행 책임자로서의 능력을 점검하기 위한 항목이다.
점수는 항목별로 「A」 「B」 「C」 「D」 「E」로 평가토록해 A는 100점, B는 75점, C는 50점, D는 25점, E는 0점으로 환산했다.
6명중 최고 점수를 받은 사람은 강경식 부총리로 68.6점이었다. 2위는 홍재형 부총리(62.6점). 강부총리가 1위를 한 것은 예상밖이었다. 강부총리에 대해 이처럼 점수가 후했던 것(?)은 최근의 경제상황의 책임이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민정부 출범때부터 쌓여져온 적폐가 지금와서 노출된 것이라는 분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나웅배 부총리는 62.2점, 이경식 부총리 59.6점, 정재석 부총리는 59.3점 등이었다. 한승수 부총리가 56.2점이라는 가장 낮은 점수를 얻은 것은 6명중 가장 짧은 7개월만 재임, 무엇하나 뚜렷한 족적을 남길 여지가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강부총리는 경제논리의 충실도, 경제수석으로부터 독립성, 개혁의지, 조직 및 업무장악력 등 4개 항목에서는 1위를 차지했으나 정책의 적시성에서는 최저점수를 받았다. 최근 기아사태 금융시장혼란 등에 시의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경제를 이 지경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그대로 반영됐다.
항목별 질문을 보면 조직 및 업무장악력은 강경식 부총리가 77.6점으로 1위였고 이경식 부총리가 56.5점으로 꼴찌였다.
정책의 적시성에서는 나웅배 부총리가 68.9점으로 가장 높았고 강경식 부총리는 33.6점으로 최저를 기록했다. 개혁의지에서는 강부총리가 79.3점으로 최고, 한부총리가 50점으로 최저였다.
타부처와의 협조항목에서는 홍재형 부총리가 71.2점으로 최고였고 정재석 부총리가 59점으로 최저였다. 정치논리에 밀리지 않고 경제논리를 펼친 것으로는 강부총리가 80.1점으로 가장 높았고 나부총리는 56.0점으로 최저였다.
경제수석으로부터의 독립성에서는 강경식 부총리가 무려 80.1점을 받으며 1위였고 이경식 부총리가 45.3점으로 가장 낮았다.
주목할 것은 대부분의 경제부총리들이 일부 항목에서는 점수가 아예 없는 「E」를 받기도 한 것이다.<조재우 기자>조재우>
◎‘한강의 기적’ 연출한 부총리들/장기영차관 적극도입 기반조성/김학렬포철·경부고속도로 건설/남덕우오일쇼크 극복 고도성장
전쟁 후유증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60년대초 경제가 국정의 최대 과제였지만 한국은 공장을 지을 최소한의 자본도 없었다. 고 장기영 2대 부총리(64.5∼67.10)는 외자 도입에서 그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언론과 야당의 「차관 망국론」에 「차관 다다익선론」으로 맞섰다. 이때 도입한 차관과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자금으로 한국경제는 강력한 개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렇게 힘겹게 이륙에 성공했지만 한국경제의 체질은 여전히 허약했다.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반면 급격한 팽창정책으로 물가상승 등의 부작용이 잇따랐다. 고 김학렬 4대(69.6∼72.1)·남덕우 6대 부총리(74.9∼78.12)는 이런 가운데 안정적인 성장 기조를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김부총리의 최대 업적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 생산 능력과 「산업의 대동맥」인 고속도로를 갖춤으로써 한국경제는 비로소 중진국 진입을 겨냥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왔다. 74년 10월 4차 중동전쟁과 함께 1차 오일쇼크가 밀려들었다. 국제수지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고 물가는 미친 듯 뛰었다. 최대 위기는 외환 고갈. 한때 1주일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한국경제가 부도 직전으로 내몰렸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남부총리가 이끄는 경제팀은 미달러화에 대한 환율을 달러당 400원에서 480원으로 현실화하는 12.7조치를 내놓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한국경제는 중동건설붐을 타고 마침내 수출 100억달러,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를 열었다.
80년대는 개발 드라이브에 따른 과열을 다스리는 시기였다. 70년대의 고물가 흐름에 제2차 오일쇼크까지 겹쳐 우리 경제는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안정속의 성장」이 새로운 경제정책의 지표가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5공 출범과 함께 등장한 신병현 10대 부총리(80.9∼82.1)때의 긴축정책은 유명하다. 지나친 긴축으로 경기를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정부안에서까지 일었을 정도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경제의 새로운 가치로 떠오른 것은 형평과 분배였다. 커진 파이를 함께 나눌 때가 됐다는 국민들의 요구는 거셌다. 학자 출신의 조순 17대부총리(88.12∼90.3)는 대표적인 분배론자로 꼽힌다. 그는 내외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토지공개념의 법제화 작업을 밀어 붙이는 등 형평과 배분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부총리 시절 경제기획원은 당시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 「경제 부총리가 둘」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경제규모도 소수 엘리트관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민간주도 경제라는 시대적 요청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에 떠밀려 경제기획원은 94년 12월 재무부와 통합해 재경원으로 바뀌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여론앞의 촛불’ 문민 부총리들/이경식쌀시장 개방파문에 낙마/나웅배부도급증 등 위기고조 책임/한승수한보 등 부패사건에 KO
경제부총리만큼 여론의 영향을 받는 자리는 많지 않다. 국제수지나 성장률 등 각종 경제지표가 고개를 숙일 때는 물론이고, 물가상승이나 대기업 부도 등 「경제체감온도」가 떨어지는 상황이 닥치면 경제부총리의 거취는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제부총리 인선폭은 그리 넓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실제로 문민정부 경제부총리 6명은 대부분 개각때마다 하마평에 오르내렸던 사람들이다. 충분한 경험, 실물경제에 대한 식견, 정치적 감각 등을 고루 갖춘 명실상부한 「경제 수장」 후보가 많지 않아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비난이 따른다.
문민정부의 첫 경제부총리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전임 정권으로부터 침체된 경제를 물려받은 탓에 김영삼 대통령은 「안정속의 성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그런 끝에 발탁된 인물이 이경식 부총리(이하 당시 직책). 경제기획원 관료출신이지만 대우자동차사장을 지내는 등 실물경제에도 밝다는 점, 박재윤 경제수석 등 청와대 인사들과의 교분이 두텁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대로 무난했다는 평가가 없지도 않았지만 이부총리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쌀시장 개방을 막지 못했다는 여론의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당시 경제팀중 재무부장관과 경제수석 등은 유임됐다. 이부총리 후임에는 강경식 한승수 황병태씨 등이 거론됐지만 예상밖으로 정재석 당시 교통부장관이 임명됐다. 정부총리의 임명은 경제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정부총리 취임 당시는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호황을 맞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정부총리가 건강문제로 도중하차하자 홍재형 재무부장관이 「자연스럽게」 부총리 자리에 올랐다. 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을 주도한 능력과 재정분야에 대한 전문성 등이 인정을 받아 누구나 1순위 후보로 꼽던 참이었다. 경기 호황이 계속되고 성장도 계속돼 홍부총리 경제팀은 강력한 안정책을 쓰며 부동산실명제 정부기구개편 작업을 해냈다. 홍부총리의 4·11총선 출마로 빈 자리를 두고 한승수 박재윤씨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뽑혔다. 총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만에 인책 대상이 됐다. 국제수지가 나빠지고 기업부도가 급증하는 등 위기론이 일면서 한승수 의원이 후임이 됐다. 경제위기의 원인이 경제팀의 능력부족보다는 산업구조 자체에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분위기 쇄신 필요성도 있었다.
그러나 한승수 경제팀도 한보사태 등 부정부패 사건이 경제전반을 강타하자 물러나야 했다. 후임은 그동안 개각때마다 경제부총리 물망에 올랐던 강경식 현 경제부총리. 하지만 정통경제관료로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를 살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강부총리도 불과 10달도 못돼 기아사태 외환위기 주가폭락 등에 대한 인책론이 나돌면서 능력에 의심을 받고 있다.<이상연 기자>이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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