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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마당엔 배울게 없다/정성진 국민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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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마당엔 배울게 없다/정성진 국민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7.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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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하다가 대학교수의 신분을 가지게 된 이후 내가 맞닥뜨린 일차적인 어려움은 과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범죄와 형벌에 관한 실정법의 내용이나 국가의 형벌권을 실현하는 절차에 관한 법률의 체계를 설명해야 함은 맡게 된 과목의 성질상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어떤 정신과 이념, 가치에 중점을 두고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번잡하고 사연도 많은 우리법의 세계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거의 매일 연구실 밖의 북악산 자락을 바라보며 스스로 한없이 곱씹고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나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법운영 현실이 어떠하든 법치주의는 나라를 민주적이면서도 질서있게 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한층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우리의 전통사회가 법보다는 예, 인륜, 도 따위를 더 중시하는 풍토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우리의 법문화가 적잖이 그 정착에 애로를 겪은 일면도 있지만 법은 국민사이의 약속이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서는 나라의 기강과 질서가 도대체 설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의 바탕에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평형감각이 당연히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오늘날 법경륜가나 법률지사라기 보다는 단순한 법기술자의 수준에 머무는 전문가가 넘쳐나고, 지난날 상식과 균형을 잃은 법집행으로 많은 국민이 피해를 입었던 기억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터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이가 되는 것보다는 바른것, 편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것이야말로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야 할 덕목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독일의 법학자 라드부르흐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법이란 바로 「정의에의 의지」이며 정의야 말로 우리가 영원히 추구해야할 가치임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이 어떠하든 학생들은 교수의 추상적인 강론보다 사회의 살아있는 현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따라하기까지 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예민하고 때묻지 않았으므로 하루하루 그들의 두 눈과 귀로 보고 듣는 현실에서 이론의 몇배를 섭취하는 것은 당연한 사리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행사를 앞두고 매일 정치의 마당에서 듣고 보고 배우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권력은 국민적 결단의 징표라고도 볼 수 있는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것이지만 그들이 혹시 단순한 여론조사의 결과가 이를 부여하는 것으로 잘못 알지나 않을까. 힘의 논리와 그 공백이 가져올 수도 있는 허망함을 보면서 그러기에 경륜이나 철학, 능력이 없더라도 권력은 일단 잡고봐야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지나 않을까.

약속 어기기를 밥먹듯하던 사람,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 남의 법의 잣대와 자기 법의 잣대를 다르게 가지고 있는 사람, 사정변경이 있으면 민주주의의 초보적 원리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은 햇빛인데도 양지의 논리와 음지의 논리를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쯤은 그들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국헌을 준수하고 국리민복을 위하겠다는 사람들의 주위에서 어떤 방법으로 무엇에 정책의 우선을 두어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논의는 미루어둔 채 오로지 경쟁자를 흠집내고 고립시키는 데에만 열중하는 모습만이 보인다면 그런 정치의 마당에서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는 자명해진다. 이념도 명분도 부족한 채 오로지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욕하고 헤어지고 영합하며 어우르는, 참으로 낡고 한심한 정치인들의 작태를 보며 부끄럽고 걱정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결국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반듯한 이념적 가치나 법집행의 이상형만을 전수한다는 것 자체가 김빠지고 멋없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면교사라고 했던가. 그러기에 학생들에게는 이런 현실을 표준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되며, 제대로 된 법치주의의 실현은 결단코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 약간은 서글픈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행사의 결과가 드러나고 지나간 법의 집행도 잊혀져 버리고 나면 학생들이 그것 보라며 교수를 비웃을 것만 같아 지금부터 잔뜩 마음이 무거워진다.<전 대검중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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