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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능내 다산 정약용 생가(차따라: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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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능내 다산 정약용 생가(차따라:27)

입력
1997.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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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계로 보여준 신의의 차문화/유배시절 제자들과 사상 첫 차모임 조직/스승은 돌아가도 매년 잎차·떡차를 시찰과 함께 부친다/다산이 죽은이후도 약속은 이어져다산 정약용(1762∼1836) 유적지를 싸 안은 팔당호와 양수리 주변 한강은 지금 만산홍엽인 언저리 산들의 물그림자로 물빛마저 붉다.

서울서 강변로를 따라 양수리로 가다가 팔당댐 바로 옆 능내역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 길가에 안내판이 나온다. 얼마 가지 않아 다산이 태어나 자라고 묻힌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말고개(마현) 마을. 들머리의 작은 언덕 이름을 따 그렇게 불렸던 마을이 지금은 다산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

86년 다산 서거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4년간에 걸친 복원사업으로 4,700여평의 유적지는 옛모습을 말끔히 되찾았다. 기념관과 생가인 여유당, 사당이 있고 여유당 뒷동산에는 다산과 부인의 합장묘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 보고 있다.

다산이라는 그의 호는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 율동 뒷산 이름이다. 그가 이 다산 기슭에 지은 초가집, 「다산초당」에서 우리나라 차문화는 굵은 선을 긋는다. 능내 말고개 마을이 태어나고 죽은 곳이라면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강진은 그의 정신적 고향인 셈이다.

다산은 국산차 예찬자였다. 그가 남겼다는 동다기는 지금 찾아볼 길 없다. 그러나 초의(1786∼1866) 스님의 동다송에 소개된 동다기의 한 귀절은 우리차에 대한 다산의 애착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월산(중국 저장땅에서 나는 차)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색과 향과 기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만약 이찬황이나 육우가 있다면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

그는 강진으로 귀향온 지 8년만에 율동마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한다. 초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백련사의 혜장 스님에게 차를 배우는 대신 다산은 주역을 가르치며 깊은 정을 쌓아 간다. 혜장 스님 앞으로 쓴 유명한 걸명소도 이때 탄생했다.

「…화자 홍옥잔의 번화로움은 부호 노공에 미칠 수 없고 돌솥에 푸른 연기 지피는 검소는 한비자를 따를 수 없네. 게눈 고기눈을 해 가지고 물 끓이던 옛사람들의 완호는 부질없이 깊고 용단과 봉단 등 궁중의 하사품은 이미 바닥이 났네. 이에 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 얻고자 할 뿐이오. 듣건대 고해의 다리를 건너려면 명산의 고액인 차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가장 큰 공이라네.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차 한 봉지를 얻기 위해 임금에게나 올리는 「소」를 쓴 익살과 마음의 여유가 새롭다.

다산의 차문화 기여를 말할 때 사람들은 사상 최초로 그가 조직한 「다신계」를 으뜸으로 친다.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과 제자 18명이 한자리에 모여 다신계 절목을 만든다.

「사람이 귀한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떼지어 모여 서로 즐기다가 흩어진 뒤에 서로 잊어 버린다면 이는 금수의 짓이다. 우리들 여남은 사람은 1808년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형이나 동생처럼 모여 글공부를 했다. 이제 스승은 북녘으로 돌아 가고 우리는 별처럼 흩어져 만약에 망연히 서로를 잊고 신의의 도리로써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이 또한 방정맞지 않을손가. 사람마다 돈 한 냥을 두 해 동안 낸 것이 이자가 생겨 지금은 그 돈이 35냥이 되었다. 스승은 서촌에 있는 몇 구역의 밭을 다신계라는 계물의 이름으로 묵혀둠으로써 훗날 신의를 꾀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셨다. 그 조례와 전토의 결부 수효를 소상히 적는다」

그 아래 계원 18명의 이름을 쓰고 따로 약조편을 두어 이런 다짐을 했다. 「매년 청명 한식날 계원들은 다산에 모여 출제된 운에 따라 연명으로 시를 적어 정유산(다산의 아들)에게 보낸다.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덖어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 이 잎차 한 근과 떡차 두근을 시찰과 함께 부친다」

한국차학회 김명배 고문은 이 다신계 절목이 우리의 독창적인 차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평가한다.

15살때 고향을 떠나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 나 고향에 돌아 온 것이 57세때.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다산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다신계를 만들고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지 5년 뒤에 적은 독백서의 한 대목.

<다산의 여러 선비가 나를 찾아와 인사말을 나누었다. 『올해도 동암은 이었느냐』고 물었더니 『이었습니다』고 했다. 『올라 올 때 올차를 따서 볕에 쬐어 말리도록 하였느냐』 하니 『미처 못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은 다시 살아나더라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내가 다산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람과 똑같다. 아마 혹시 이른다면 모름지기 기색을 짙게 보이는 일이 하느니라>

다신계 절목에 적은 「차를 보낸다」는 약속은 다산이 생존했을 때는 물론이고 훗날까지도 길게 이어졌다고 한다. 가을이 짙은 다산 유적지에서 은은한 차향기와 신의의 향기를 느끼는 것도 이 가을의 기쁨이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차구 재질·모양도 차에 따라 달라/가장 흔한 차관은 손잡이·부리 직각인 옆손잡이 차관

차를 마시려고 차구를 장만하다 보면 문득 낯선 그릇을 만나게 된다. 차관은 옆에 손잡이가 불쑥 튀어 나와 있고 물식힘 사발에는 부리가 달려 있다. 물의 온도에 따라 차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차의 성질을 염두에 두고 특수하게 개발된 것이다.

차를 우려 내는 물의 온도에 따라 차관의 손잡이 방향이 달라지고 물식힘 사발 사용 여부에 따라 우려내는 차의 종류가 다르다. 즉 차에 따라 차구의 재질과 모양이 달라진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차관은 손잡이가 부리와 90도를 이룬 방향에 달려 있는 것으로 흔히 옆손잡이 차관이라 부른다. 부리를 중심으로 손잡이가 뒷쪽에 붙은 차관, 손잡이가 위에 달린 차관, 그리고 손잡이가 없는 차관도 있다. 일본에서는 손잡이가 없는 차관을 「호빙(보병)」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60도 이하의 물에서 고급 녹차를 우려낼 때 쓴다. 70도에서 우려 내는 보통 녹차는 옆손잡이가 달린 「규수(급수)」를 이용한다. 90도 이상에서 우려 내는 중국의 우롱차를 비롯한 발효차는 뒷손잡이가 달린 「차보」를 쓴다.

흔히 일본풍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는 것도 바로 일본의 「규수(급수)」가 우리전통 차구의 일반적인 형태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물론 옆손잡이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숯불을 담아 옷을 다리는 다리미나 약탕관 등에서 그런 형태를 찾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옆손잡이가 달린 전통 차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광주 무등산 춘설헌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허백련 선생이 쓰시는 차관은 정말 뜻밖이었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주전자 윗부분에 철사를 묶어 쓰고 계셨다. 그 차관에는 남에게 보이려고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듬으며 검소함을 실천하는 대인의 수수함이 배어 있었다.

그릇 전시회와도 같은 요란한 차회에 참가할 때마다 나는 문득 그 어른의 그런 모습이 떠 오른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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