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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안녕히 가십시오(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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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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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대통령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한참 생각을 해봤습니다. 『대통령,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면 좀 무례하게 들리고, 연세가 비슷한 처지라 「선생」이라고 불러도 되긴 하겠지만, 그런 호칭은 국민의 한사람으로 자기 나라 대통령을 부르는 온당한 말투는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각하」라는 다소 봉건적 잔재의 냄새가 풍기는 낡은 호칭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각하, 각하께서 신한국당을 탈당하셨다는 뉴스에 접하여 소생은 적지않게 놀랐습니다. 물론 15대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며, 국정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표면적 이유만이 신한국당을 물러나시는 이유의 전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적이 있으면 대선관리가 편파적으로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의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한다고 했을 때 당시의 김영삼 후보는 매우 심기가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심경이, 여당의 당적을 가진 현직 대통령은 여당의 승리를 위해 크게 도움이 된다고 혹시 믿었던 것입니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92년 대선때에는 여당의 후보가 대통령에게 『제발 탈당을 말아주시오』했는데, 97년 대선때에는 여당의 후보가 대통령에게 『제발 당을 떠나 주시오』라고 하게 됐다는 사실만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대통령이 당적을 가지고 대선을 치렀으면 공정관리가 어려웠으리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김대통령의 탈당동기는 논리의 벽에 부딪친 것이 사실입니다.

각하,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이 나라에 여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어느 당입니까. 여당이 없는 나라라면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회창 후보와 조순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다 함께 「3김 청산」을 부르짖는데, 그것은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인맥의 뿌리도 뽑혀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그렇다면, 「3김 청산」 뒤에 김대통령의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런 논리로 나간다면 여당은 없는 나라가 오늘의 한국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이인제 후보의 「3김 청산」은 전략적인 것이고, 사실 그 내용은 「두김 청산」이지만 대의명분을 표방하기 위해 「3김 청산」이라고 내세웠는지도 모릅니다. 정계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진심으로 각하를 끝까지 지키려는 세력이 당당하게 존재하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두 김씨가 아직도 이 나라 정치판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이번만은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정권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각하만 혼자 물러나시다니! 10여년 전에 속칭 「3김 낚시론」을 발표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소생으로서는 가슴 한구석에 한가닥 섭섭함을 금치 못합니다. 떠날 때 같이 떠나시지, 두 사람을 그냥 두고 홀로 가시다니!

각하, 40년도 더 되는 긴 세월 넘나드시던 험난한 정치판을 떠나시는 이 마당에, 꼭 한마디 만이라도 정직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15대 대선후보들 중에 각하께서 꼭 후계자가 되었으면 하시는 후보가 어느 후보입니까. 국민 모두 앞에서 공공연하게 털어놓기 어려우시거든, 제 귀에 대고 조용히 그 이름만을 속삭여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 비밀만은 죽는 날까지 지켜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태우씨는 비록 민자당을 탈당은 하였지만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를 적극 지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뛴 사람들 중에 노태우씨의 심복이나 직속부하가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천절의 대통령 특사도 받지 못하고 오늘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에서 17년 6개월의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야 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를 과연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노 전대통령의 오늘의 심경이 궁금합니다.

각하, 항간에는 『청와대를 안양 근처로 아예 옮기는 것이 어떨까』하는 몰지각한 자들도 적지 않은 이 마당에, 퇴임 후에 노태우씨 신세가 되어서는 안될 것 아닙니까. 그 점만은 깊이 유념하셔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두 김씨들은 그대로 정치판에 남겨 두고 정계를 떠나시는 정치 9단의 김영삼 대통령이 안쓰럽습니다.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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