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정치적인 승패와 서사시의 풍성함은 어긋난다/유럽중심의 선입견 청산/새로 쓰는 세계문학사/제주도에서 하와이·서남아까지/온갖 서사시 인용 ‘읽는 재미’이스라엘민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낸 모세는 나일강에 떠내려온 바구니에서 구해낸 아기였다. 신라의 탈해, 아프리카 자이르 니양가족의 고대영웅 므윈도도 그랬다.
제주도에 말로 전해오는 「괴내깃당본풀이」(영웅서사시의 일종)에도 같은 모티프가 등장한다. 그중 한 대목. 『「저게 너의 아방이다」하니, 송곡성은 아방 무릎에 펏짝 매달려서 안길 적에,…소천국(송곡성의 아버지)은 생각할 때 「이 자식도 불효자식이다」. 당장 죽이려고 하다가 오백서 딸애기 첩각시(소천국의 후처)가 말을 하되, 「죽이지 말고, 앞에서 보기 싫으니까, 무쇠철갑을 해서, 바다에 가서 집어넣어버리는 것이 좋수다」. 무쇠철갑을 해서, 그 속에 들여앉혀 동해용궁에 띄웠다…』 그러나 송곡성은 세계의 다른 지역 다른 영웅들이 그랬듯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승리자가 된다. 용궁에 표착해 용왕의 사위가 되고 머리 둘 셋 넷 달린 괴물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지배권을 빼앗는다. 효성같은 덕목은 돌보지 않고 용맹을 자랑하는 고대영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서울대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에서 세계 곳곳의 「서사시」를 다각도로 비교 검토하고 서사시의 개념을 새로 세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근거를 둔 서사시 개념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제히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문학사 이해를 그릇되게 만드는 억지다. 유럽의 서사시를 일차적 논거로 하지 말고 다른 여러 곳의 자료를 고찰해 정립한 이론을 적용해야 유럽문명권중심주의의 선입견을 청산할 수 있다』 조 교수의 의도는 세계문학사를 유럽중심적 시각이 아닌 진정한 보편이론의 토대 위에서 새로 쓰는 것이고 서사시론은 연극·서정시론과 함께 이를 위한 기초작업이다. 그가 검토하는 서사시는 제주도, 한국 본토, 중국과 일본, 몽골, 티베트, 터키민족군, 필리핀, 태국, 베트남, 인도, 아프리카, 하와이, 아메리카대륙, 서남아지역까지 걸친다.
이 책은 이론서지만 온갖 서사시를 인용, 읽는 재미를 더한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족의 탁월한 영웅서사시 「마나스」의 한 구절. 『이것은 선조가 남긴 이야기이니, 내가 노래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옛 사람이 유산으로 남겨, 대대로 전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영웅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마음 속의 번민 어떻게 씻어내리…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고 근심도 걱정도 없이, 적국인이 감히 침범해오지 않아, 세상의 서로 원수진 사람들이 없기를. 우리는 기름을 써서 먹을거리를 만들고, 목 마르면 말젖과 꿀을 마시리라』
키르기스족 등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이나 몽골 티베트족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서사시를 갖추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한족의 중국인에게는 서사시라 할 것이 별반 없다. 아이누족 서사시는 대단하지만 일본서사시는 있는 지 의문이다. 왜? 『정치적인 승패와 서사시의 풍성함은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 조 교수의 결론이다. 문학과지성사 발행, 1만7,000원.<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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