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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째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미당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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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째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미당 서정주

입력
1997.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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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생 시만 쓴 미련한 소야”/시쓰기란 절입태산이야 그래도 나대로 진실다해 늘 영생을 파왔고 60여년 함부로 쓰지 않았으니 다행이지스스로를 「오죽 미련한 소」에 비유했지만, 그의 눈빛과 달변은 「화사」의 이미지를 어쩔 수 없이 떠 올리게 했다. 미당 서정주.

미당이 『시는 오래 쓸수록 깊은 산골 속의 애로들만 더 첩첩히 많이 겪어야 하는 절입태산』이라며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를 냈다. 등단 후 61년, 처음 시를 발표한 때(1933년)로부터 치면 64년간, 15권의 시집을 팔순 넘어서까지 낸 살아 있는 한국시사 미당, 그는 요즘 어떤 심정으로 시를 쓸까.

『오랜만에 최근 서울대생들 앞에서 「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을소재로 시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어』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그게 어떤 거냐』고 되풀이 물었다. 『그래서 말했지, 들어봐라, 이게 시가 되나 안되나. 「아내의 손톱 발톱 깎아주고/ 난초 물 주고/ 무심코 바라보는 햇빛이여」 돼, 안돼?』

그 시가 이번 시집에 실린 「도로아미타불의 내 햇살」이다. 「아내 손톱/ 말쑥히 깎어주고,/ 난초/ 물 주고 나서// 무심코 눈 주어 보는 초가을날의/ 감 익는 햇살이여.// 도로아미타불의/ 도로아미타불의/ 그득히 빛나는/ 내 햇살이여」 그는 지금도 이렇게 28년째 살고 있는 사당동 예술인마을, 마당에 감나무가 내다보이는 단독주택 2층 서재에서 시를 쓴다.

「현대시인이 아니라 전근대시인이다」 「서정주 시의 발전은 한국현대시 50년의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라마화한다」에서 「접신술가」라는 비난까지 받은 미당이지만 그가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시로 일관한 자신의 평생을 소에 비유했다. 『젊을 때나 지금이나 종시일관 되게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나야. 소란 놈이 풀을 먹고 일곱번을 되새김질하지 않아? 그런 꼬락서니지. 그래도 육십몇년 시를 함부로 쓰거나 양산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처음부터 시로 유명해지려 한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데 불가피한 유일한 것으로 택한 것이니, 나대로 진실을 다해 시 앞에 나가 자기 인식을 그득히 담는데 주력해 왔어』

이번 시집에는 노시인의 이런 인식이 잘 담겨 있다.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자화상」중에서)던 젊음의 모습, 꽃뱀의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화사」중에서) 같이 분출하던 시인의 언어는 이제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다섯살짜리/ 어린 집지기의 자유가/ 어느만큼 잘 일은/ 어느 밝은 오후에/ 주춤 주춤 걸어서/ 집 앞 시냇가로 가 보니,/ 역귀풀꽃 테두리한 그 맑은 시냇물에/ 그림자 드리운/ 흰 구름 한송이 떠서/ 나를 마중 나와/ 내 머리위에 올라 앉었다/ 그래 이때부터 나는/ 이 구름을 늘 내 머리에 매달고/ 살아오다가 어느사이 80이 되었다」(「어린 집지기의 구름」 전문) 미당은 이번 시집에서 이렇게 동심과 통하는 영원에의 희구를 쉽게쉽게(오세영 서울대 교수는 이를 『미당이 적절하게 시를 타락- 세속화시키면서 미학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인생과 문학에 달관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이라 평하고 있다) 이야기체로 풀어놓고 있다. 우리 가을 농촌풍경을 그린 「논 가의 가을」, 자연 파괴를 우려하며 생명을 희구한 「요즘 소식」같은 절창이 그렇다.

그는 자신의 시력을 들려주면서 『늘 영생을 파 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영생은 불멸에의 희구는 아니다. 「영원한 정신적 생명」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다 그 영생에 대한 자각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미당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옛 문단 일화로 넘어갔다. 젊었을 때 일찍이 노자 도덕경을 읽은 것부터, 폴 발레리와 말라르메, 릴케, 니체, 슈르레알리스무(초현실주의를 미당은 이렇게 발음했다)에 경도되던 「휴매니스트」의 시절. 『죽은 윤동주도 릴케 영향 받았어. 영랑은 나를 친아우처럼 알았고, 재사 지용의 별명은 「할미새」였지』

그러나 그의 시력의 한 뚜렷한 시기가 되는 신라주의에의 추구는 한국전쟁이 계기가 됐다. 『죽더라도 고향 가까이 가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전주로 피난 간 그는 『이런 난세에 옛 어른들은 어떻게 살았나』고민하며 민족의 황금기였던 신라사와 더불어 삼국사 연구에 골몰한다. 그래서 나온 시집이 「신라초」와 「동천」이다. 미당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 한 편만 들어달라는 주문에 일순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동천」이지, 거 왜 다섯 줄로 된 시 있잖아. 그게 내 정신의 에센스를 표현한 거야』

후배 시인들을 보는 미당의 눈은 날카롭다. 『시에는 혈맥이 보여야 해. 그런데 요즘은 시인들이 양산될뿐더러 너무들 많이 쓰는 것같애. 양산주의야. 중량이 딴은 큰 시인이라는 사람들도 그렇고… 비슷비슷해서 시인 이름을 딴 사람으로 바꿔놓아도 그냥 속아 넘어갈 것같아』

옛적 김영랑이 미당을 일러 『자네가 내 뒤를 이어라』며 제주도 여행비를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미당은 그러나 자신의 추천으로 등단한 100여명이 넘는 시인 중에서도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시인을 꼽는 것은 주저하는듯했다.

미당은 95년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전 세계의 산 이름 1,625개를 왼다는 내용의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최근 여행의 경험에서 여기에 산 이름 세개가 더 보태졌다. 시베리아 여행때 가 봤다는 「시코테 알린」산은 백두산 호랑이의 원산지라고 해서 기억에 남고, 체코의 「아브라치나야」, 「따르도끼야니」산도 목록에 들었다. 외는 방법이 재미있다. 「아브라치나야」는 「아부하지 마라」, 따르도끼야니는 「딸이 쓰는 도끼 가지고 있니」라고 해서 기억한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성경 읽고 체조하고 아내 대신 원두커피 끓이고 토스트 굽고 30∼40여분씩 산 이름을 외는 데, 그는 『각 산이 있는 나라의 수도 이름까지 넣어서 다시 해야겠어』라며 『그러면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나머지 시간은 장을 보거나, 그리고 시를 쓰는 시간이다.

그의 희망은 소박하다. 『바라는 것 일체 없어. 그저 부부가 소꿉장난 친구 같이 손잡고, 여행하고, 그리고 함께 가는 거야. 이쁜 여자를 보면 마음 속에 아직도 「이쁘구나」라는 감각이 꿈틀꿈틀하니 이것이 문제이긴 한데…. 내년이 결혼 60주년인데 아내하고 타이티나 가봐야겠어』

미당은 5일 신병치료차 아들이 의사로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하종오 기자>

□미당 연보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당선. 「시인부락」 편집인 겸 발행인

▲38년 방옥숙과 결혼

▲41년 제1시집 「화사집」

▲46년 제2시집 「귀촉도」

▲54년 예술원 회원, 서라벌예대 교수

▲55년 제3시집 「서정주 시선」

▲60년 제4시집 「신라초」. 동국대 교수

▲68년 제5시집 「동천」

▲75년 제6시집 「질마재 신화」

▲76년 제7시집 「떠돌이의 시」

▲77년 문인협회장

▲80년 세계여행기 「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보려느뇨?」. 제8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

▲82년 제9시집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83년 제10시집 「안 잊히는 일들」

▲84년 제11시집 「노래」

▲88년 제12시집 「팔할이 바람」

▲91년 제13시집 「산시」. 「서정주 세계민화집」

▲93년 제14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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