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에 숨은 ‘정치메시지’/중세 풍경화와 이데올로기 교직관계 밝혀/독특한 작품접근 방법,미술해석 지평확대1415년께 랭부르 형제가 그린 세밀풍경화 「베리 공의 시력 그림」. 달력 아래 멀리 성을 배경으로 농부가 한가롭게 밭을 갈고 있다. 종소리 은은히 울려퍼지기라도 하면 농부들은 곧 쟁기질을 멈추고 성당을 향해 성호를 긋기라도 할 것 같다. 풍경화에 지나지 않을 듯한 이 그림에는 그러나 정치적 신호가 명확히 깃들어 있다.
『화가의 관점은 성주의 은밀한 의도와 부합하는 것이다. 성을 거점으로 토지는 정확하게 구획돼 있고 십자로 중앙에는 정교한 석조건축물이 군주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십자로 중앙에 있는 도로표석은 방향을 알리는 물건이 아니라 군주의 통치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하늘에는 바다의 요정 멜뤼신느가 날개 달린 뱀 형상을 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성을 보호한다. 권력을 유지하는 신의 비호를 암시한다. 풍경화의 요람기 작품인 이 그림은 자연에 대한 근대인간의 새로운 태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영주가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주문해 그려진 것이다』
서양풍경화의 세계를 정치적 기호가 노골적으로 숨어든 이데올로기적 표상으로 해석한 미술사학자 마르틴 바른케(60·함부르크대 교수)의 「정치적 풍경」이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노성두씨 번역으로 나왔다. 92년 독일에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문화사와 정치사적 관점에서 작품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미술해석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받았다.
이 책은 어떤 미술작품이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세계관과 어떻게 교직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1435년 슈테판 로흐너가 그린 「최후의 심판」은 성채풍경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도시는 천국, 성채는 지옥으로 명확히 구분돼 있다. 축복받은 자들은 성문을 통해 도시로 들어가고 불타는 성채 옆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은 땅 밑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그림은 성채가 지배하던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은유인 동시에 새로운 도시의 시대가 도래함을 선언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물을 보면 태양은 진리와 정의의 빛으로서 군주의 상징이었고 르네상스의 정원은 군주의 체면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학 속에 감추어진, 때로 음흉하고 때로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와 이데올로기적 지배의도를 간파해내는 것은 미학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해석작업인 동시에 미학에만 매몰되지 않는 이성회복 작업이다. 일빛 발행, 7,800원.<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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