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운길산 수종사(차따라:26)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운길산 수종사(차따라:26)

입력
1997.11.04 00:00
0 0

◎맑고 깨끗한 석간수 “여기가 차인의 고향”/좋은물 찾아 병 고치던 세조 임금이 짓고 조선말 다승 초의 스님이 벗찾아 머물던 곳/작은 차실 차려놓은 동산 주지스님 “더 좋은물 어디 있을까”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양수리)의 장관을 한눈에 보려면 운길산(610m) 중턱 수종사가 제격이다. 절벽위 수직으로 쌓아 올린 축대끝 종루에 서면 양수리 전체가 눈아래에 펼쳐진다. 금강산쪽에서 내려오는 북한강과 태백 오대산에서 흘러 오는 남한강을 싸안고 있는 두루뭉실한 산자락이며 팔당의 넓직한 호수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은 대가가 그린 한폭의 수묵화같다.

수종사는 그 이름답게 물과 인연이 깊다. 눈아래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도 강이지만 대웅전 왼쪽 약사전 아래 바위에서 솟아 흐르는 석간수가 이 절의 보배이다. 향기로운 꽃에 벌 나비가 찾아들 듯 좋은 물있는 곳에 차꾼이 몰리게 돼 있다.

이 물 때문에 수종사에는 옛부터 내로라는 차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중에서도 조선말 대표적 차승 초의(1786∼1866) 스님이 이곳에 머물며 쓴 시들이 시선을 끈다.

「한 잠 자고 일어 났는데/ 차 한잔 줄 사람 없을까./ 게을리 경서 쥐고 눈꼽 씻었네/ 그대가 여기 있는줄 알고 이곳 수종사까지 오지 않았나」(몽회수진앙산다 나파잔경세안화 뇌유지음산하재 수연래주백운가)

전남 대흥사에 머물렀던 초의는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1793∼1865)나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1788∼?) 등 많은 차벗들과 사귀고 있었다. 당시 승려는 한양 4대문안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4대문안에 들어 갈 수 없었던 초의는 교외에 있는 친구들의 집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수종사 아랫 마을인 능내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아들 유산(정학연)이 살고 있어 한양만 오면 마음 편한 수종사에 짐을 풀고 이곳에서 당대의 거물들을 만났던 것 같다. 홍현주가 양수리 강가에서 초의를 생각하며 <수종사를 바라보며> (망수종사)라는 시를 쓴다.

「잔설과 이끼 성긴 돌계단에 서서/ 돌아가는 사람 쌍을 이룬 것이 부럽지 않네./ 노승은 달과 함께 탑에 한가롭게 기대어 서고/ 마른 잎은 바람에 날려 창에 부딪치네./ 종소리만 맑은 세상에 울리는데/ 누대의 그림자가 찬 강물에 떨어지네./ 행장속에 산중의 물건이 아직 남아 있어/ 가져 온 질그릇에 차를 달여 마신다」

조선 7대왕 세조(1417∼1468)는 악성 피부병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물좋은 오대산에서 요양하고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대궐로 돌아 오다가 경치가 좋은 이곳 두물머리에서 하룻 밤을 지낸다. 잠결에 종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종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보니 지금 수종사 약사전이 있는 바위에 18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그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맛이 일품인데다 눈 아래 펼져지는 두물머리의 경치가 세조의 마음을 움직였다.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물좋은 곳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 나서고 있는 판에 대궐이 가까운 곳에서 좋은 물을 만났으니 놓칠 턱이 없다. 8도에 이름 난 석공들을 모아 경사가 급한 이 절벽에 8층 축대를 쌓아 절을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지난 85년 초의와 추사가 쓴 차시가 적힌 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섰다. 수종사 들머리 비석거리에 비석이 있긴 했던 모양이나 추사의 글씨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리는 도굴꾼들이 가져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서울서 팔당댐과 다산 정약용묘소를 지나면 양수리대교. 다리를 건너기 전 삼거리 왼쪽에 수종사로 들어 가는 길이 보인다. 서북쪽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난 길 3㎞가량을 오르면 수종사다. 몇년전 절 아래까지 찻길이 이어졌다.

수종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지 동산 스님은 작은 차실을 별도로 차려 놓고 있을 정도로 차를 좋아 한다. 차 우려내는 솜씨가 몸에 배어 있다.

『해인사나 통도사, 법주사 물도 좋지만 수종사 물을 앞지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세조가 묻혀 있는 광릉 봉선사 물도 이름있지만 수종사 물에는 못미친다』고 했다.

약사전 아래 석간수가 솟는 바위에는 지붕을 해서 달고 그 앞에 기도실을 만들어 두었다. 물이 고여 있는 샘에 접근할 수 없도록 양철문을 달아 굳게 잠궈 놓았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물은 겨울에는 마시기 좋을 정도로 미지근하고 여름에는 손을 넣을 수 없을 만큼 차다. 여름에 이 물을 양철그릇에 담아 햇빛 아래 보름을 두어 보았다. 그릇에 이끼가 끼이지도 않았고 물이 변하지 않아 그대로 마실 수 있을 정도였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남에게 보이기위한 비싼 차그릇보다 삶의 향기 담아내는 자연스런 찻잔을

많은 사람들은 차기는 한가지 유약으로 처리한 차관과 찻잔 등 이른바 한 세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차그릇 풀세트라고 하면 찻잔받침과 차를 담는 차통, 물을 버리는 그릇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차생활에는 이런 종류의 완벽한 갖춤보다는 실질적인 삶의 향기를 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한 차인은 자녀들에게 생일마다 찻잔을 하나씩 선물하고 있다. 차향기를 어린 자녀들에게 전하여 주기위해서라고 한다.

20년 전의 일이다. 해남으로 초의 스님 유적지 답사를 갔을 때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우륵선생은 앞사람의 무릎이 닿을 지경인 작은 방에서 우리 일행에게 차를 한잔씩 내어 주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에게 건네진 찻잔은 모두 제 각각이었다. 그 시절 한국의 내로라는 차인이 아니신가. 의아해 하는 우리에게 『차에 매이지 말고, 자유로와야 하네』하는 말씀을 해주셨다. 찻잔은 누가 만들었는 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떻게 쓰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처음 차기를 구입할 때 비싼 것을 사들이다보면 차보다는 차기에 구속된다. 가스가마니 장작가마니 하여 어디서 구웠느냐에 따라 10배 이상 값 차이가 난다. 소위 유명작가의 것은 어지간한 월급장이 한달 수입을 다 털어도 장만할까 말까이다. 그런 찻잔과 차구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차의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육우는 유명한 「불선가」에서 그런 찻잔을 널어 놓은 차회를 경멸하였다. 「황금 술잔도 부럽지 않고/ 백옥 잔도 부럽지 않네/ 아침에 벼슬하러 나가는 것도 부럽지 않고/ 저녁에 루에서 열리는 연회도 부럽지 않네/ 부러운 것은 저 서강의 물/ 일찌기 경릉성을 지나 오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차구를 고를 때는 정갈한 차빛이 잘 떠오르는 그릇이면 족하다. 그리고 내 손때가 묻고 시간과 함께 차때가 묻는 만큼 차생활도 깊어진다. 그 깊이 만큼 차에 어울리는 찻잔이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