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 굳게 닫혀진채 잡초와 녹슨 기계뿐/아무리 뛰어다녀도 자금마련 ‘별따기’/71년 공단조성이래 최악의 불경기맞아 섬유업 공동화 심화국내 수출산업의 요람이며 한국전자·섬유산업의 성공신화를 창조해낸 구미공단.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1공단과 2, 3공단이 마주보고 있는 구미공단은 대규모 공장들과 도로를 활발히 오가는 물류차량들로 인해 일견 활력이 살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공단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치유하기 어려운 만성적 질환으로 속이 곪을대로 곪아들어 가고 있는 구미공단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D섬유 T산업 S화섬…. 전자와 함께 구미공단을 지탱하는 양대축인 섬유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1공단에는 한 두집 건너 폐업과 휴업을 알리는 낡은 안내판들이 늘어서 있다. 굳게 닫힌 문 안쪽으로는 깨진 유리창과 아무렇게나 자란 잡풀들, 그리고 먼지와 함께 녹슬기 시작한 기계들이 나뒹구러져 있다.
9월 한달동안 구미공단내에서 휴폐업한 업체는 36개. 그나마 공단본부의 통계에는 중소 임대업체들은 잡히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수치는 2배이상일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추정이다. 공단본부에 따르면 현재 입주한 407개의 업체가운데 정상가동되는 업체는 340개선. 71년 공단조성이래 최악의 수치다.
무거운 기계음으로 아직 생존을 알리는 나머지 업체들도 사정이 예전과는 같지않다. 공장앞 야적장에는 산처럼 재고품이 쌓이고 종업원들의 움직임에 활기가 없다. 「사장은 부재중」, 업체마다 입이나 맞춘듯 같은 얘기다. 한 종업원은 『아무도 빌려주지않으려는 자금을 구하러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사장이 안쓰러워 지난달 월급얘기는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 섬유업체들의 친목단체로 30여개에 가까운 회원사를 가진 직물업협회 관계자는 『구미의 섬유업체는 불황과 구조조정 대기업부도 등 한국경제의 모든 그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며 『회원사의 상당수가 부도로 쓰러졌고 살아있는 업체도 자금난으로 위기에 몰려 밤새 안녕한지를 물어봐야할 형편』이라고 밝혔다.
구미공단에 입주한 섬유업체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은 섬유부문의 불황이 본격화한 95년말부터. 인건비부담을 이기지못하고 대기업들은 해외공장을 차려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일부 여력이 있는 협력업체들도 현지행에 동참했다.
공동화의 뒤끝에 남은 중소업체들은 지난해 연말 시작된 전체적인 불황과 대기업부도로 인한 자금압박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3중고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했다.
공단본부의 김영하 기업지원처장은 『문제의 핵심은 자력으로는 불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납품업체였기에 기술개발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고 이제는 섬유업종이 한계상황에 머물러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종전환을 할 여력이 없다는 얘기다.
기업은행 구미지점의 권영보 차장은 『금융위기나 외환의 문제 그리고 대기업의 부도 등 서울에서 벌어지는 난리는 사치스러운 얘기』라며 『공단 중소업체들은 당장 전혀 희망이 보이지않는데도 하루의 생존을 걸고 뛰어다녀야하고 팔리지 않는 물건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은행이 거래하고있는 업체 40여개 가운데 8개가 부도가 나 법원경매에 부쳐졌고 불황때문에 절반가량의 가격에도 경락이 되지않고 있다고 권차장은 귀뜸했다.
구미상의의 김종배 진흥과장은 『가장 심각한 것은 현금이 아니면 원자재도 살 수 없고 납품도 할 수 없을 만큼 업체 금융권 전반에 불신감이 자리잡은 것』이라며 『불신의 폭이 커져가는 신뢰의 도미노와 불황이 만성이 되어버려 마비상태에 이르른 것이 중소업체의 분위기인 셈』이라고 밝혔다.
기아 쌍방울 등 아직 정부와 금융권의 관심을 끌고있는 대기업의 그늘에 묻혀 70년대 화려한 성장신화의 주역이었던 섬유산업은 뿌리부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구미=이재열 기자>구미=이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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