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사상·왕도정치 등 찬란히 꽃핀 성리학문명/외국인 무관심 탓하기 앞서 우리부터 애정 가져야중국이나 일본의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은 그 장대한 스케일, 영웅호걸들의 활약, 그리고 처절한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심과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본은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명의 형태를 창출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서양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사대국으로, 그리고 전후에는 세계굴지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함으로써 역시 그 문화와 역사에 대한 많은 관심을 유발시켜 왔다.
그런데 이러한 거인들, 문명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역사는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아류로 간주되면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여 왔다. 사상에 있어서나 역사에 있어서 한국은 독자적인 문명적 패러다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아울러 중국이나 일본을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은 한결같이 그 나라의 문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연구에 임하여 온 반면 한국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외국학자들은 한국문명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나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의 문명과 근대사는 분명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문명을 창출하거나 인류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전쟁을 일으킨 적도 없다. 그러나 인류문명에 진정한 기여를 하는 것은 이처럼 거창하고 충격적인 차원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명과 같이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실로 인간적인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경우가 더욱 값어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역사는 실로 소중하다. 주자성리학이라는, 당시로는 최첨단의 사상을 대륙으로부터 도입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또 그 사상이 뿌리 내리고 실제의 삶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면서 500년을 넘게 지속한 조선조는 인류역사에 보기 드문 찬란하고 안정된 문명을 꽃 피웠다. 물론 하나의 사상이 오래 지속되었다고만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상체계가 도그마로 변하고 오직 전제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쓰이는 경우를 우리는 수 없이 많이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조는 주자성리학을 오랫동안 주류사상으로 간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인간형, 이상적인 가족사회, 그리고 이상적인 정치체제에 가장 근접하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조의 선비는 학문과 도덕성, 자기제어능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군자의 상을 체현하였고 조선의 대가족제도는 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현대의 서구식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핵가족제도에 비하여 월등히 나은 것이었다. 조선의 정치제도 역시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제정치, 환관정치, 군벌정치를 지양하는 동시에 일본의 무사를 기반으로 하는 막부정치를 모두 지양하고 임금을 정점으로 하되 선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주자성리학의 이상인 왕도정치를 실현시켰다.
그렇다면 조선조의 찬란한 문명은 왜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연구되지도 않고 있는가. 왜 외국의 학자들은 명이나 청, 도쿠가와(덕천) 시대라면 그토록 감탄하고 사랑하면서 조선조에 대하여서는 애정은 커녕 비판과 무시로 일관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인들 자신이 조선조에 대하여 무식하고 비판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사관, 계급사관, 자유주의 사관 그리고 심지어는 일부 민족사관을 통해서 조차 조선조를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비인간적인 체제로 간주하도록 세뇌되어 왔다. 한국인들 자신이 조선조에 대하여 비판적인데 하물며 학술적인 이유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외국의 학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에 힘입어 한국의 문화에 대한 전에 없는 관심이 국내외에 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조선조의 제도와 사상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야말로 한국의 문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때가 왔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갖고 있는 전통사회의 정치와 사상, 제도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일이다.<「전통과 현대」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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