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다. 조그만 개인병원을 하나 가지고 있는 어떤 의사가 마작에 미쳤다. 진료실 옆방에 앉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마작만 둔다. 주색잡기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술독에 빠졌다가도 계집에 미치면 술생각을 안하게 되고, 계집에 미쳤다가도 노름에 빠지게 되면 계집도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요새는 자나깨나 누우나 앉으나 흰색의 작은 공 하나만 눈앞에 보인다는 골프광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마작광인 이 의사가 그 날도 아침부터 마작판에 앉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어린 간호사가 그 방의 문을 열고 『선생님, 환자가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사는 낮은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좀 기다리라고 해』
얼마 뒤에 그 간호사가 다시 나타났다. 『선생님, 환자가 몹시 아프답니다』 이번엔 의사가 좀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니까』
얼마 뒤에 다시 나타난 간호사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선생님, 환자가 너무 아파서 못 참겠답니다』의사가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정 못 견디겠으면 다른 병원에 가 보라고 해』 이윽고 간호사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선생님, 환자가 죽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의사가 마작판을 차고 일어나 진료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환자의 호흡이 끊긴 상태였다. 천하의 명의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우리 귀에는 『선생님, 환자가 너무 아파서 못 참겠답니다』라는 간호사의 애원하는 소리가 분명히 들려오는데 이 백성의 의사이어야 하는 청와대의 대통령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다른 병원에 가 보라고 해』라고 차마 할 수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일까. 오늘 이 나라의 대통령은 무엇에 미쳤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저렇게 무너져 가는데도 명예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은 어찌하여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속수무책인가. 차마 국민 앞에 밝히기 어려운 술책이 있었다 하여도 지금쯤은 그것을 국민 앞에 털어놓고 이해와 동정을 구해야 마땅할 것 아닌가. 이인제 후보를 최근에 청와대에서 만나 「탈당유감」의 뜻을 표했다고 청와대의 수석비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씨가 떠난다고 했을 때 『나의 시체를 밟고 떠나라』라고 소리를 질렀어야 옳지, 대통령께서는 왜 지금 와서 아무도 믿지 못할 그런 말을 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서씨, 한씨, 김씨 세 의원은 이미 탈당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은 모두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이라면 측근이고 심복이라면 심복이지 않은가. 일국의 대통령이 왜 이런 식으로 2중, 3중 플레이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들 세의원의 신한국당 탈당도 그저 「유감」인가. 앞으로도 탈당이 계속될 전망이라는데 매번 『유감, 유감, 유감』으로 일관할 참인가.
「이회창 죽이기」라는 말은 너무 야만스러워 쓰기조차 거북하지만 한때 「대쪽」같다던 한 시대의 양심있는 법관이 오늘 찔리고 찢기고 매맞고 터져서 피를 흘리며 국민 앞에 서있다.
매우 초라한 모습이다. 그래서 전혀 여당을 도울 마음이 없던 사람들도 신한국당 후보에 대해 무한한 동정을 하게 된 사실을 앞으로의 임기가 백일도 남지않은 청와대의 주인은 알고 있는지. 설마 그것이 대통령이 처음부터 갖고 있던 복안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까. 이회창을 한번 죽였다 다시 살리려 했는가.
환자가 죽고나면 다시 살릴 길은 없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중립이 아니라 신한국당 살리기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후보경선을 통해 여당의 후보로 당선된 사람을 중심으로 이씨들, 서씨들, 박씨들, 김씨들이 뭉칠 수 있도록 이제라도 대통령이 정치 9단의 노련한 솜씨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환자가 죽었습니다』라고 간호사가 소리지르기 전에 의사는 마작판을 내던지고 환자 곁으로 달려가야 한다. 환자를 살리는 길은 그것뿐이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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