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을 붙들고 울어볼 힘이 넘쳐날 때 희망도 꽃피는 것이니…벨기에로 장기여행을 떠난 선배에게서 오는 편지에는 묘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서울에서의 태평이 일종의 증세였다면 여기에서의 평화는 위생이다』는 이상한 시 같은 그의 편지글은, 서울에서의 그의 생활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예술가 외에 어떤 삶의 자리도 마련하지 않았던 그는 이른 아침의 풍경을 몰랐을 것이라는 게 나의 짐작이고 보면, 그와 나는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의 풍경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태평스러움을 하나의 병적 증세로 느껴지게 하는 이 도시의 아침을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쓴다. 아직도 이 도시는 바람이 떠도는 곳, 사람들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곳이라고. 또한 나는 행여 그 바람이 빠질세라 전전긍긍하고 있노라고. 절망이라는 바늘에 깊이 찔릴세라 탄력있게 움직이느라고 정작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나의 분주함 또한 하나의 증세라고.
절망하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그마한 희망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 실연당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는 이 도시의 아침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바닥을 박차 오르지 못하고 허공을 매달리듯 떠도는 것이 이 도시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은 곧바로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오, 선배여 그대가 돌아오면 나도 그대의 태평에 감염되고 싶다. 아직 한 번의 입김도 받아보지 못한 풍선의 처음 모습처럼, 처녀의 모습처럼 조용히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다. 또한 남몰래 절망하면 어떠리. 나는 희망도 절망도 모른 채 부유하며 살지는 않으리라. 절망의 끝을 붙들고 울어볼 힘이 넘쳐날 때 희망도 꽃피는 것이니, 나 이 도시의 손바닥에서 조용히 내려와 그 발밑에 입술을 부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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