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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의 조건/이지관 가산불교문화원장(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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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의 조건/이지관 가산불교문화원장(화요세평)

입력
1997.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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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화평을 깨는 탐욕·무지를 버리고 좀더 높은 눈으로 ‘생명’대국을 바라보자만산홍엽과 황금빛 들녘 때문에 그나마 마음이 청량하다. 울긋불긋 투명하게 반짝이는 단풍은 무심한 자연의 혜택이요, 황금빛 결실 또한 농부와 계절의 정직한 봉사 때문이다. 아침신문을 보니 블랙홀이 충돌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별들이 탄생하였다 한다. 이렇듯 시야를 들어 먼 우주의 지평을 향해 세계를 보면 인간의 조건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다. 자연의 무심한 순행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참으로 아이들이 배울까 두려운 어른들의 욕망 때문이다. 어서 소득없는 정쟁을 버리고 화평한 나라를 위해 봉사했으면 한다.

숲에 들어가 꽉 들어찬 나무와 나무들을 보라. 아름다운 숲일수록 아름다운 조건이 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빈 공간 사이를 양보하여 가지를 뻗고 하늘 높은 공간을 서로서로 배려하여 거스르지 않아, 저 나무 때문에 이 나무가 희생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누어 갖기에 하늘빛도 바람도 고르게 나누며, 큰 물에도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여 그 숲은 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광폭한 수종이 침입하여 그 배려와 공존의 원칙을 깨기 시작하면 숲은 얼마 안 가 황폐해지고 그 숲을 의지해 생명을 가꾸던 수많은 중생이 집을 잃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평정을 잃은 고통과 분노가 다른 생태계를 침해하게 되어 숲의 평정은 오랫동안 돌아오기 어렵게 확산된다.

인류는 지구에 있어 그렇게 배려와 공존의 원칙을 깬 광폭한 수종과 다르지 않다. 욕망과 재화를 마음껏 누려 안락과 풍요를 자랑했지만 남은 것은 욕심과 재화의 남용으로 인한 엄청난 수난들 뿐이다. 천연의 갈대밭이 없어지면 그 갈대밭을 위해 그리고 그 갈대밭 때문에 공존했던 수많은 생명이 터를 잃고 헤매게 되며, 푸른 솔잎 위에 하얗게 빛나던 새들이 떼로 주검이 되어 모두를 슬프게 한다.

누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조건을 도구와 사유함이라 하였는가. 다름아닌 영장의 조건이 재난의 도구와 욕망으로 남용되어 공존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으며, 그 영장의 조건이 다시 영장의 굴레가 되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영장인 인간의 조건을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저 고려 광종때 균여대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또 만물의 영장답게 살도록 다음과 같은 내용을 향가로 만들어 모두가 따라 부르게 했다. 바로 보현십원가다. 화엄에 있어 부처는 일체 만물의 영성이다.

「만물의 영성을 위해 항상 예경하고, 항상 만물의 공덕을 칭송하며, 항상 마음을 다해 그 덕에 공양 올리라. 또 공존의 화평을 깨는 자신의 탐욕과 무지를 위해 늘 업장을 참회하며 헌신과 지혜로운 이 있으면 항상 그 공덕을 따라서 기뻐할지언정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며, 이 세상에 공존의 사랑과 지혜가 넘쳐나길 기원하며, 또 이 진리가 늘 세간에 영원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여지이다. 다시 생각하되 나의 아득하고 깜깜한 마음보다 중생의 마음을 따라 생각하게 하고 좋은 일마다 나의 일이 아니요, 이 모든 결과는 타인과 만물의 은혜임을 잊지 말게 하여지이다」

이렇게 동방의 아침에 모든 나라사람이 영장이 되길 기원하며 노래 부르게 하였다.

이제 좀 더 눈을 높이 뜨고, 우리 인간만을 위한 행복의 조건인 경제부국, 문화복리의 차원을 넘어 영장의 조건을 참회하고 실천하는 작지만 큰 나라 생명대국을 꿈꾸며 뜻을 크게 하여야 할 때다. 문화지수도 중요하다. 그러나 생명의 외경을 현시하는 문명지수가 높으면 문화는 저절로 향상한다. 이젠 산 밑에 고기굽는 집들이 줄어 산사의 향내가 동네어귀를 맴돌게 해야한다. 낚시로 사냥으로 잡는 일보다 방생하는 일로 기꺼워 해야하며, 휴일이면 나들이로 바쁘지 않고 봉사로 신바람이 나야한다. 우리의 문화재 개발에 희생됨이 없이 그대로 빛나고 산하대지가 청정해지는 날, 먼나라 사신들이 「그 좋은 나라 한번 가 봅시다」하고 영장의 대국이라 칭송할 날을 기원하며, 아울러 사라진 갈대밭, 무너진 문화재를 생각하며 균여스님의 간절한 향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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