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컴퓨터능력은 정보접근 수단일뿐 일의 전문·창조성은 대학안에서 길러진다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곳 하나 희망적이지 못하지만 특히 대학은 더 암담한 우수를 부른다. 4년간 컴퓨터와 자격시험, 어학연수, 영어회화, 취업스터디까지 숨가쁘게 뛰며 열심히 공부해도 직장을 얻지 못한 졸업생들이 늘어나는 오늘의 대학은 내일의 우리 국가가 짊어질 무한한 고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 유례가 없는 이같은 취업대란은 우리에게 변화하는 세계와 교육의 본질을 직시할 기회를 준다.
지난 5년간 우리의 대학은 「정보화」와 「세계화」라는 몽상적인 관념론의 제물이 되어왔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내일의 주역들이 새로운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처방들이 난무해 왔다. 그 결과 영어와 컴퓨터가 대학의 교양교육을 밀어내었고 가장 다감하고 창조적이어야 할 대학문화는 고시학원과 취업학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영어와 컴퓨터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대학의 존재이유는 폭넓은 교양교육에 입각한 전공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단순한 기능이나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응용하는 문제해결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대학은 만성적인 고용불안의 시대를 살아갈 오늘의 학생들에게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에 대해 고뇌하게 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 만큼 영어에 갸륵한 국민이 없다. 빚을 내서라도 어학연수는 보낸다는 멘탈리티가 학부모들을 지배하고 있다. 대체 영어를 잘하면 세계화가 되고 국제경쟁력도 생긴다는 헛소문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인재는 필리핀 학생들이다. 나는 필리핀에서 방송국 PD였다는 아저씨가 배달해준 자장면을 먹으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또 정보화에 대한 과민반응에 지배당하고 있다. 모든 인류가 인터넷에서 재화와 지식에 대한 투명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정보화사회란 실로 유치한 백면서생들의 잠꼬대일 뿐, 현실에서는 거의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어떤 자본가도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투명한 시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대규모 이윤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겉으로 공정한 시장경쟁을 주장하면서 안으로 독점의 욕망을 관철해왔다. 이제까지 독점과 폭리를 추구하던 자본주의가 단순한 컴퓨터 테크놀로지 때문에 성자들의 사회로 변한다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오늘의 취업난은 미시적으로는 경기침체와 불황의 여파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세상이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고숙련 노동자들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세상은 변화하는 시장의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며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인재들을 원한다. 취업이 어려워질수록 새로운 인력의 가장 큰 덕목은 창조성과 전문성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대학이 사로잡혀 있었던 관념론들을 재고하게 만든다.
정보자본주의의 흐름은 서서히 창조적인 정보와 지식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학생들이 대학시절의 거의 모든 여가시간을 바쳐 몰두했던 어학능력과 컴퓨터 구사능력이란 이런 창조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로 접근하기 위한 번지수를 확인하는 기능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자신의 참신하고 창조적인 정보를, 자신의 돈을 모두가 가져갈 수 있는 공용인터넷에 던져두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말하는 내용이며 컴퓨터가 아니라 정보의 창조성이다. 산더미 같은 정보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존재하는 이같은 창조성은 하나의 일에 깊은 애정을 갖고 평생을 몰두하려는 자세에서 생겨난다.
점점 더 빨라지는 기술혁신 앞에는 어떤 일자리도 안전하지 않으며 한번 없어진 일자리들은 호황이 되어도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학원들은 일자리를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평생의 일을 줄 수는 없다. 대학생들의 미래는 자신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대학, 정규교과교육을 하는 교수들의 강의실에 있는 것이지 시류가 만들어낸 이런저런 과외학원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혹독한 취업대란에서 우리 사회와 대학이 배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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