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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하늘(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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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하늘(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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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혀서 못살겠다. 분통이 터져서 못살겠고 울화가 치밀어 못살겠다. 어디에 정이 있고 어디에 도가 있는지 눈을 닦고 찾고 싶고 길을 막고 묻고 싶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도 못살겠다. 이 나라에 정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에 여당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야당이 여당인지 여당이 야당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나라가 몇몇 사람의 장난감이란 말인지 나라를 가지고 잘도 논다. 정치는 없고 선거만 있는 나라, 선거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나라, 무엇 때문에 있는 선거인지, 이런 선거를 꼭 해야 하는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 너그러운 나라가 우리나라다. 적이 동지보다 더 미덥고 나라의 안전이나 영광보다 개인의 보신이나 영달이 더 급한 정치인들의 나라에 우리 국민들이 속절없이 살고 있다. 일일이 입으로 말하자니 분한 숨만 가쁘다. 모를 것 투성이 속에 알만한 것이 있다. 왜 우리나라의 1인당 담배 소비량이 세계 제1위인지를 알겠다.이 울기를 뚫고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세상을 잊고 산에나 오르자.

작년 가을에 갔던 강원도 정선군 남면 증산의 민둥산을 다시 찾아간다. 그 억새밭을 보고 싶다.

작년에는 등산로 초입의 가파른 길을 한참 꼬불꼬불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와 밭구덕마을 쪽으로 빙 둘러 올라갔었는데 이번에 보니 새로 지름길이 나 있다. 새길은 꼬불거리는 법 없이 거의 직코스요 그러자니 경사는 아주 급하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것 같다. 몇걸음 오를 때마다 주위를 둘러싼 태백산맥의 연봉들이 산너머로 또 산너머로 나타나고 하여 층층이 쌓인다. 산길은 정상 가까이까지 내내 직로의 가풀막이다.

올해는 철이 일찍 들었던지 작년 이맘 때는 한창이던 억새가 벌써 시들시들해졌다. 민둥산 산정에는 그래도 작년보다 훨씬 더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은백의 장관을 심호흡한다. 억새는 언제 보아도 무념 무사의 몸짓으로 탈속의 안식과 위안을 준다.

하늘은 그야말로 가을 하늘이다. 구름 한점 없이 코발트색으로 맑다. 서울서 온 성싶은 등산객 중의 하나가 여기까지 용케 따라 올라온 꼬마에게 『저 하늘 좀 봐라』한다. 그러자 꼬마가 소리 지르는 말이

『야아, 하늘이 하늘색이다』

실로 하늘의 본색이 여기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하늘에서 하늘색을 잃어버려왔다.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하늘색 하늘을 이 산정에서 찾았다. 대관절 저 꼬마는 저 하늘 빛깔이 하늘의 원색인 줄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언제나 충충한 대도시의 하늘 빛깔이 하늘색인 줄로만 알고 있을 것같은 꼬마도 하늘의 정색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오지다. 산에서 내려와 산마을 거리를 다녀보면 음식점에서나 가게에서나 사람들이 참 어질고 순박하다. 이런 인심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있었던가 싶어진다.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 백성의 본성이다. 잃어버린 하늘색을 산정에서 발견하듯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원형을 산골에서 발견한다. 원형이 남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것이다.

민둥산의 곧은 길을 오르면서 누가 이런 미련한 지름길을 냈나 싶었었다. 그러나 산길을 잘 타는 산사람들로서 바로 질러 바로 가는 직로가 정도일 것이다.

금년 정초 우직한 소의 해를 맞으면서 나는 「똑바로 가시오」 한마디가 올 한해의 행법이었으면 싶다고 썼다.

막문대산로

파운맥직거

(오대산 가는 길을 묻지 마라

노파가 이르기를 똑바로 가라 하더라)

그러나 지금 누가 똑바로 가고 있는가. 이 한해가 거의 다 가고 있는데 연말의 대선을 향해 똑바로 가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사도와 비도의 길 위에서 아귀다툼이다. 비자금 정국만 하더라도 당자들이 아무도 정도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답답하다. 순정한 야생의 억새풀이 휘덮은 원야에서처럼 모두가 제발 원색과 원형과 정도를 찾았으면 좋겠다.

이 소나기라도 퍼부을 것같은 어두운 하늘의 시대에 정말이지 하늘색 하늘이 그립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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