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총선 재회이후도 숱한 우여곡절이회창 신한국당총재와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결별하고 말았다. 이총재와 김대통령의 결별가능성은 정치권의 한편에서 줄곧 화두가 돼왔다. 그러나 집권당의 대통령후보가 현직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한 역사상 초유의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충격적이다. 이총재와 김대통령이 알게 모르게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온 애증의 관계에 있었음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두사람의 갈등관계는 7월 이총재가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후보로 당선됐을 때 자연스레 정리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아들 병역면제 문제로 이총재의 지지율이 폭락양상을 보이자 틈새는 이내 다시 벌어졌다. 특히 김대통령은 이총재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을 때 정색을 하고 이를 물리쳤다.
두사람 사이에 형성된 갈등의 뿌리는 따지고 보면 깊다. 이총재가 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김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에 발탁될 때만 해도 사정은 사뭇 달랐다. 김대통령은 당시 대법관이었던 이총재를 「대법원장감」으로 치켜세웠다. 이총재는 그후 93년 12월 총리로 전격 기용돼 「대쪽」 이미지를 강화했으나 이총재가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 신설과 관련, 헌법상의 총리권한침해를 내세워 대들자 김대통령은 주저없이 이총재를 해임했다. 총리임명 4개월만의 일이다.
신한국당은 95년 6·27지방선거에서 대패하고 국민회의가 출범하자 96년 4·11총선을 앞두고 「버렸던」 이총재를 힘들여 영입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시작 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총재는 선대위의장으로서 총선승리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이총재는 총선승리를 발판으로 대권행보를 시작하려 했으나 순탄치 않았다. 배후에 김대통령주변의 견제가 있었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올해 2월 한보정국의 와중에서 궁지에 몰린 김대통령은 예상을 뒤엎고 이총재를 당대표로 기용했다. 이 과정에서 이총재가 김대통령에게 상당한 「무리수」를 두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도 있다.<고태성 기자>고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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