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 학생이건 대선후보이건 입시·여론조사 ‘점수’의 노예가 돼버린건 아닌가옛날 영화이지만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보면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기계화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공장 조립라인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만 계속하는 채플린은 휴식시간에도 자신도 모르게 공구를 갖고 아무 나사나 보이는대로 조이게 된다. 심지어 지나가는 여인의 옷에 달린 단추를 보고도 나사인 줄 알고 공구를 들이대며 조이려고 해서 여인이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반복적인 업무의 일상화가 무의식적으로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현대사회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간을 기계화시켜 놓은 모습이 희화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현대사회에서 우리를 일상화시켜 놓은 또 다른 우울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질적인 현상을 양으로 치환하는 습관이다.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본질이 객관화해 표출된 양적인 가치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양적으로 점수 매겨진 것에 길들여진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특히 우리와 같이 어릴 적부터 점수로 사회적 학습이 되어 온 경우 그 증상은 더욱 심한 것 같다.
점수에 목을 맨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학교성적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일이 이제는 사회면 작은 구석을 연일 장식하고 있는데도 그저 우리는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게 되었다. 직장인은 연봉으로 능력이 평가되고, 대학의 질은 합격자의 수능성적으로 평가되고, 영어실력은 토플이나 토익점수로 평가된다. 그저 좋은 학교다, 영어실력이 있다, 좋은 사람이다 라는 질적인 평가만으로는 왠지 성이 안 차는 모양이다.
십여년전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일본사람들이 왜 그리 프로야구에 열광적인가 하고 관심있게 보았다. 그리고는 그들이 프로야구에서 열광하는 것은 선수들의 스타일, 감독의 경기운영, 그날의 경기흐름보다 개별 팀이나 선수가 갖고 있는 타율 승률 도루수 등 점수라는 것을 알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도 박찬호나 선동렬의 매 경기를 흥미를 갖고 지켜 본 것은 그날의 투구 내용이나 경기운영의 스타일보다는 승률과 기록을 깨는 일 등 점수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인에게 인기가 많은 스포츠 관전은 점수로 흥미를 북돋워 주는 대표적인 이벤트이다. 이처럼 스포츠 가요 영화 연봉 아파트평수 자동차배기량 등 모든 것이 순위가 매겨지고 점수가 주어지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점수로 행위를 규율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효율성을 높여 줄 수는 있지만, 수단과 목표가 바뀌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또한 접하게 만든다. 요즘 문제가 되는 외국어고와 과학고 사태에서 보면 내신의 상대평가가 대입에서 1점이라도 불리하게 되면, 학부모들은 과감하게 학생들을 학교에서 자퇴시키고 검정고시 출신으로 만들어 대학에 진학하게 한다. 빛나는 졸업장, 급우들간의 우정, 사제간의 정 등은 현실을 모르는 어리숙한 인간들의 퇴락한 구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교육의 본질보다는 점수가 제일인 모양이다.
요즘 대선을 보더라도 여론조사라는 점수에 의해 후보들이 정치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선에서 실패하고 나서도 여론조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는 마치 특수목적고 학생들이 자퇴를 하듯 탈당을 하고 대선에 임하겠다고 한다. 조금 불리하더라도 규칙을 지키기보다는 점수로 평가되는 현실을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의 점수를 높이기 위해 경제가 추락을 거듭하는 현실에서도 국정운영의 책무와 수권정당으로서의 자존심마저 저버린 여당의 폭로전까지 우리는 지켜 보아야 했다. 또 다른 측은 여론조사의 점수가 높다는 이유로 대국적인 관점에서 모든 잘못된 정치적 관행들도 느긋하게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책이나 정강은 어디 가고 인기투표식의 여론조사 점수가 정치의 흐름을 주도해야 하는가?
채플린이 작업이 끝난 뒤에도 아무 곳에서나 나사를 조이는 것을 보고 우리는 웃지만, 점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우리의 일상도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특수목적고의 학부모가 되었건, 대선 후보가 되었건 점수의 노예가 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지혜를 찾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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